에베레스트가 초등정되었다. 등산가들은 이제 최고봉이라는 높이의 문제에서 해방되었고 등산사의 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최초라는 단어의 마력은 많은 갈등과 모순점을 단숨에 덮어 씌우기도 하고 중독성이 강한 유혹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만큼 등산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비를 간직한 산도 없었다.이제 등산가들은 미래의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베레스트 초등정은 히말라야 역사의 진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세계의 산악계에 남
미국인 최초로 K2에 오른 짐 윅와이어는 산에서의 고립과 육체의 탈진에서 오는 묘한 희열감과 산에서 얻는 인생의 값진 교훈, 그리고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어렵고 위험한 등반을 즐겼다. 하지만 산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체력의 한계, 동료들의 죽음은 짐에게 더 이상 등반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그럼에도 그 악몽의 기억에서 잠시 벗어나면 다시 등반을 계획하는 중독성을 보이고 만다. 짐은 1940년생으로 20세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했고 에베레스트와 K2에 관련된 독서를 많이 했다. 가장 감동을 준 책은 모리스 엘조그의 《안
제2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메스너는 주말마다 은행원인 동생 귄터와 등반을 함께 다녔다. 1968년 여름에 피아트 자동차를 구입한 메스너는 귄터와 함께 등반여행을 하며 토니 히벨러와 아이거 북벽 노스 필라 초등정에 성공했다. 1969년 대학에 입학해서 기계학을 전공하며 심도깊게 공부하고 있는데 티롤 산악계로부터 안데스 등반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안데스 화야시 산군의 예루파하 동벽을 초등하고 돌아온 메스너는 학업을 포기했고 등반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도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그는 바로 치
라인홀트 메스너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 남 티롤의 한적한 산골인 빌네스에서 보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없어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또래의 아이들과 몰려다니는 일이 그의 하루 생활이었다. 마을을 마치 성곽처럼 둘러싸고 있는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해 했다. 이곳 농부들에게 그러한 호기심은 반갑지가 않았다.주말에 도시 사람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빌네스를 찾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행이나 관광이란 개념도 없었다. 거칠고 고립된 여건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하지만 메스너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교
에르족은 전체적인 등반능력과 자질면에서 세 명의 샤모니 가이드 출신보다는 못했지만, 어떤 힘에 의해서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프랑스산악회 회장이었던 루시엔 데비는 에르족의 친구) 또한 대원들은 등반이 끝난 후 5년 이전에는 등반에 관련한 어떤 글도 출판하지 못하고 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서약을 강요당했었다. 1951년에 에르족의 공식 등정보고서가 나왔고 1956년에 라슈날은 《Vertigo Notebooks》을 집필했다.그러나 이 원고가 완성될 즈음에 라슈날이 스키를 타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1950년 6월 3일, 모리스 에르족(1919-2012)과 루이 라슈날은 힘겹게 안나푸르나 정상을 향했다. 라슈날은 발이 이상했고 동상에 걸린 것 같았다.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에르족에게 제의했지만 에르족은 혼자서라도 올라가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정상에 오른 에르족은 등정의 기쁨에 환호했고 프랑스 국기와 산악회 깃발, 기타 몇 장의 사진을 찍고 감동적인 순간을 만끽했다.날이 저물고 폭풍의 조짐이 보였다. 몬순이 시작된 것이다. 라슈날은 조바심이 나서 계속 에르족에게 하산하자고 재촉하다가 지쳤고 그냥 짐을 챙겨서 하산했다. 좀
빙하가 시작되는 1,500미터 지점의 캠프에서 새벽 5시, 아침 메뉴인 오트밀을 위해 버너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해는 아직 리지 너머에 있어 희뿌연 새벽이 고통스럽게 열리고 있다. 한여름인데도 미국 북서부에 있는 노스 캐스케이드 지역의 추위는 지독했다. 백색의 소음인 정적에 파묻힌 채 침니록(2,340m) 등반 채비를 서두른다.등반 전의 기대와 초조, 긴장감이 교차했고 크램폰 밴드를 바짝 조였다. 침니록 북봉 아래의 빙하지대를 횡단해서 남봉 밑의 유갭 지점을 통해 등정을 시도하기로 했다. 군데군데 형성된 크레바스를 우회하느라고 시
영국의 거벽등반가인 사이먼 예이츠가 은행 로비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 페루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이런 분위기의 공간을 피해 왔었다. 진지하고 위압적인 공간, 감정 없는 은행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플라스틱 차단막, 그리고 교회에 온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돈을 신중하게 애지중지하는 고객들의 모습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지난 몇 주 동안 사이먼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황당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의 극한 체험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상황들을 겪어야만 했다.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겨를 없는 반전의 연속들이었다. 무슨 일이
텐트 문이 모두 열려 있어 안으로 눈이 가득 쌓여 있었고, 장비와 연료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침낭과 식량이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세 명의 대원이 텐트를 새로 세웠는데, 더 이상 아래 캠프로 내려가기에는 체력이 소진되었고 시간도 늦어, 침낭 한 개로 세 명이 최악의 고통스런 밤을 보냈다. 다음날 울프는 캠프7에 그대로 남아 있고 비스너와 파상 라마가 캠프6로 내려갔다.아직도 그들의 등정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캠프6에는 틀림없이 식량과 장비, 셰르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캠프6에도, 그리고 캠프2까지도
1939년 미국의 K2(8,611m) 원정대는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글과 이야기, 의혹을 남겼다. 세계 초등정을 눈앞에 두고 실패한 이 등반대에서 어떤 일이 왜 벌어졌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었는가 하는 추측과 의혹은 지금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원정대가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원정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1939년 7월 19일 오전 9시경, 등반대장인 프릿츠 비스너와 셰르파인 파상 라마는 K2 정상을 향해 7,900미터 지점의 캠프9을 떠났다. 아직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눈과 얼음, 바위지대를 무산소로 오
1924년 6월 8일 오후 12시 반경, 에베레스트 북동릉 8,600m 지점에서 조지 말로리와 샌디 어빈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면서 세기적인 미스터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실종되었는가, 아니면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했는가? 세계등산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사라진 연기를 해낸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뛰어난 산악인들이 수없이 실종되었다. 에베레스트는 그 많은 비밀들을 숨기기에 충분히 거대하다. 빙하는 추락하는 모든 물체를 언제라도 얼음 무덤에 감출 수 있다. 단지 그들이
카라코람의 K2(8,611m) 봉은 고도로 따지면 최고 높이가 아니지만, 등반루트의 난이도와 예측불가의 악천후로 아직까지 ‘산 중의 산’으로 위엄을 지키고 있다. 1953년 여름, 찰스 휴스턴이 이끄는 미국의 K2 등반대는 등반이 실패로 끝나자 무척 지친 상태로 파키스탄의 스카르두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 꿈과 희망을 가득 채운 이탈리아의 아르디토 데시오 교수와 리카르도 캐신이 나타났다.이들은 다음해에 있을 K2 등반에 대비해서 빙하 정찰과 루트 정보 수집, 입산 허가서를 받기 위해 분주했다. 데시오는 카라코람 지역 산군에 대해 상
텐징 노르게이는 영국의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를 정찰하기 위해 티베트에 갔었던 1921년보다 몇 년 전, 그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그는 아버지의 야크 떼를 몰고 티베트 카마계곡의 높은 초원에서 에베레스트 동벽 기슭까지 간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온 가족이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서 네팔로 이주했다. 티베트에서 건너온 셰르파들과 함께 에베레스트의 남쪽에서 살았다.다른 셰르파들과 마찬가지로 텐징도 인도의 다아질링으로 가서 유럽 등반대의 일을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국인들의 네팔 왕국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1935년, 그에게
영국의 등산가인 쿠르트 디엠베르거(Kurt Diemberger)는 히말라야에서 특이한 경력을 한동안 유지했었다. 그것은 1970년대 말에 히말라야 8천 미터 자이언트 5개를 등정한 기록이다. 1957년 브로드피크, 1960년 다울라기리, 1970년 대 말에 에베레스트와 마칼루, 가셔브룸2봉을 등정한 것이 그것들이다.1986년에 8천 미터 자이언트 14개를 인류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4년 당시 낭가파르바트와 마나슬루를 등정해 디엠베르거와 같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디엠베르거와 메스너는 세 번째 8천 미터 도전이 될
등반의 세계는 늘 진화하고 발전해왔는데 전통적으로 거벽등반은 대개의 경우 인공등반 기술에 의존했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등반에 대한 가치와 관심들이 고조되었다. 작고 좁은 홀드와 크랙에서 좀 더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등반대상지를 찾았던 등반세계는, 1년 내내 훈련과 등반에만 몰두하는 마니아 성향의 엘리트 클라이머들이 나타나면서 그 문제를 풀었다.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은 10대 때부터 요세미티의 여러 암장에서 등반을 해왔고 전 세계로 등반여행을 돌면서 끼 있는 말괄량이에서 고상한 월드챔피언으로 성장해 나갔다. 키가 크지 않
“당신이 열망하는 꿈을 이루면서 산다는 것은 그에 상당한 위험과 어려움 없이는 결코 성취되지 않습니다. 단지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어집니다. 자유는 내 삶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는 산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산을 등정하고 무사히 하산해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산 또는 자연을 정복해서, 또는 그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내 안의 약점과 단점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내가 1년 내에 8개의 고산을 등정하겠다는 이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는 내 자신의 꿈속에서
1966년 8월 13일, 휴가를 이용해 알프스의 쁘티드루 서벽을 오르던 두 명의 독일 등반가가 조난을 당했다. 18일에 대대적인 구조대가 조직되어 구조캠프를 설치했다. 구조대는 쉬운 루트로 정상에 오른 후 하강하여 조난위치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그러나 폭설과 강풍이 이들을 정상에 묶어두었다. 다른 네 명의 구조팀은 서벽을 가로질러 북서릉으로 접근했다. 이 루트 역시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어 바위의 홀드가 코팅된 듯 반질했고 크랙에 피톤을 설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게리 헤밍은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쪽 몽블랑을 등반하기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를 하던 아버지를 3세 때 여윈 에릭 십튼(1907-1977)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인도와 유럽을 자주 여행했다. 이때의 영향으로 십튼은 방랑생활을 즐겼고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십튼이 9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정식교육을 시키려고 런던으로 갔지만 글 공부가 부족했던 그는 읽기와 쓰기가 느렸고 실독증세로 고생했다.실독증은 독서 장애자가 문자를 보고도 발음으로 이어지는 연상작용이 되질 않고 정확하게 듣지를 못하는 것으로, 결국 외국인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영어 강좌를 수강했다. 이 학교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
K2봉은 1954년 7월 31일, 히말라야 8천미터 자이언트 중에서 네 번째로 초등정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산악회의 꼼빠뇨니와 라체델리는 110년 전인 1909년에 개척된, 지금은 K2봉에서 가장 고전적인 루트가 된 아브루찌 능을 따라서 정상을 향한 길을 열었다. 이 아브루찌 능을 개척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탐험가 아브루찌 공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경이로운 등반과 탐험으로 명성을 떨쳤다.1873년 1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그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1861~1946년)의 손자로 당시 아버지는 스페인 왕이었다.
클라이머가 등반 중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미사려구도 정당화, 또는 합리화 될 수가 없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더 크고 회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영국의 등산가인 조 태스커는 마리아 코피(저자) 삶의 중심이었지만 그의 유일한 관심과 목표는 등반이었다. 태스커는 코피가 자신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고는 했지만 등반과 관련된 주요 문제는 그녀와 상의하지 않았고 코피에게 주어진 조건 이상의 어떠한 약속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등반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코피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