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㉕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㉕
  • 호경필 전문위원
  • 승인 2019.07.29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 인생은 이제 다른 안나푸르나가 시작되고 있다.
■짐 윅와이어, 도로시 불릿 공저ㅣ출판년도 1998년ㅣ쪽수 322쪽ㅣ출판사 포켓북스
■짐 윅와이어, 도로시 불릿 공저ㅣ출판년도 1998년ㅣ쪽수 322쪽ㅣ출판사 포켓북스

미국인 최초로 K2에 오른 짐 윅와이어는 산에서의 고립과 육체의 탈진에서 오는 묘한 희열감과 산에서 얻는 인생의 값진 교훈, 그리고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어렵고 위험한 등반을 즐겼다. 하지만 산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체력의 한계, 동료들의 죽음은 짐에게 더 이상 등반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 악몽의 기억에서 잠시 벗어나면 다시 등반을 계획하는 중독성을 보이고 만다. 짐은 1940년생으로 20세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했고 에베레스트와 K2에 관련된 독서를 많이 했다. 가장 감동을 준 책은 모리스 엘조그의 《안나푸르나》였다. 인류 최초의 8천미터 봉의 초등 기록인 이 책에서, “내 인생은 이제 다른 안나푸르나가 시작되고 있다”고 한 엘조그의 말은 짐에게 신성한 삶의 신조가 되었다. 안나푸르나는 단순히 산의 이름이 아니라 인생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도전의 대상이 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짐은 1962년 매리 루와 결혼했는데 지금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은 36년간의 결혼 생활과 5남매의 성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950~60년대 미국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여자는 남자의 성적 파트너일 뿐이고, 가사일에만 열중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위치였다. 그러나 짐이 출장을 가거나 원정등반을 오래 떠나면 매리는 오히려 생기가 넘치고 즐거워 했다.

짐에 의존하지 않고 딸 셋과 아들 둘을 키우려면 독립적인 생활력이 강해야 했고, 자신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 질 일이 점점 늘어만 갔다. 다른 가정의 부인들보다 사회참여의 기회가 많아졌고 다양한 자원봉사로 사회활동의 범위도 넓어졌다. 주변의 친지들이 남편의 등반활동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녀는, “짐의 등반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가 없는 상황을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절약을 해야 했고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네팔이나 파키스탄, 중국, 티베트 등과 같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을 열어 주는 역할을 했다”며 자위하곤 했다.

짐은 암벽등반에서 빙벽등반으로 관심을 돌렸고 눈사태와 폭풍우 같은 좀 더 자극적인 위험에 노출되고 싶은 도전 의식이 강해졌으며, 1975년 미국의 K2 원정대에 참여했다. 그동안 미국인이 여섯 명이나 희생되었던 비정한 K2는 갖가지 위험요소가 숨어 있었지만 그만큼 더 매력을 끄는 산이기도 했다.

이번 원정대는 미국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짐 휘태커가 대장을 맡았고 나머지 여덟 명의 대원은 히말라야 등반경험이 전혀 없었다. 날씨 상황과 포터들의 자질에 문제가 있었고 대원들 간의 갈등과 부조화로 원정대는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대장 휘태커의 부인인 다이안느도 촬영담당으로 원정대에 참여했다.

하지만 고도를 높이면서 등정에 집착하게 되었고 대원들은 그녀의 등반능력 부족을 우려했다. 그녀의 비약과 만용은 대장과 대원들 간의 관계를 멀게 했고 갈등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또한 대장이 친동생인 루 휘태커를 1차 등정조로 내정하면서 대원들 간의 불화는 더 심각해졌고, 갈렌 로웰은 이 불미스러운 대화의 마무리를 죽음이라는 주제로 끌고 갔다.

데날리에서의 신속한 등반 스타일과는 다르게 고소캠프를 여러 개 설치하며 등정을 시도하기로 했다. 캠프2부터는 북서릉으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지만 강풍과 추위가 대원들을 텐트 안에 가둬두고 만다. 등반진행이 지연되면서 분위기가 침체되었고 신경들이 예민해 졌다. 로웰과 프레드 스탠리는 기관지염과 기침으로 고생했고 레이프 패터슨은 무기력했으며, 대장과 대원들의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대원도 발생했다.

더구나 대장과 부인이 매일 아침 침낭을 텐트 위에 걸쳐 놓고 말리는 광경은 다른 대원들의 향수를 더욱 자극했다. 대장과 동생만 고소적응이 잘 되었고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포터 역할만 할 뿐이라며 불평불만이 고조되었는데, 대장과 동생의 등정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풍이 그칠 줄 모르고 대원들의 질병과 캠프3 구축에 대한 불확실성, 대원들의 의기 소침으로 인해 원정대는 결국 철수를 결정하고 만다.

1978년, 짐 휘태커를 대장으로 하는 15명의 K2 원정대가 다시 구성되었다. 3년 전의 원정대보다 더 강력한 대원들로 보충되었다. 3년 전의 악몽을 거울삼아 대장이 좀 더 유연해 졌고 대원들의 의견도 귀담아 들으며 독단적인 진행을 지양했다. 하지만 대원들 각자의 개성이 강하고 나름대로 등정에 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기적인 경쟁을 피할 수가 없고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대장이 1차 등정조를 발표했을 때 명단에서 빠진 대원들은 실망과 불만을 그대로 노출시켰고, 등반 중에 공공연한 남녀의 삼각관계도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루 레이차트는 히말라야 등반경험이 풍부했고 릭 릿지웨이는 놀라울 정도로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존 로스켈리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열정을 지녔고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대원들 간에 존경심을 갖고 등정을 이루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등반에 임한다면 팀워크는 어렵지 않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던 중 캠프를 구축하기 위해 빙하횡단을 하던 크리스 챈들러와 체리 베치가 부주의로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 7년 전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다울라기리에 등반한 경험이 전부인 체리와 체력이 다소 허약한 크리스가 원정대에 짐이 될 뿐이었는데, 이 사고를 계기로 크리스와 체리가 며칠 후 캠프2에 단 둘이 남아 모든 대원들을 당황케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체리의 남편인 테리 베치가 베이스캠프에 있었으니 그들의 행위는 충격적이었다.

어수선한 캠프 분위기 속에서도 등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구간인 캠프3와 캠프4 사이의 칼날 능선도 루와 존, 릭이 돌파하면서 1차 등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우와 강추위, 심설로 캠프1에 고립되었고 9월 2일, 첫 번째 등정 시도를 위해 캠프5를 출발했다. 7,900미터 지점의 캠프6를 통과했고 8,100미터 지점에 이르러 짐과 루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했다. 바틀넥에 이르자 루의 산소통에 이상이 생겼고 산소통과 카메라가 든 배낭을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8,300미터 지점에서 루는 짐에게 자신이 횡설수설하면 바로 하산시킬 것을 부탁했고, 둘은 서로를 묶었던 로프를 풀고 전진을 계속했다. 부르러운 오렌지 빛깔의 황혼이 주변의 산들을 채색시키는 오후 5시경 루와 짐은 어깨동무를 하며 드디어 미국인 최초의 K2 등정자가 되었다. 산소통이 없는 루가 추위로 먼저 내려갔고 짐은 좀 더 촬영을 하느라 늦어졌다.

랜턴이 없는 짐은 야간에 하산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고, 그는 8,450미터 부근에서 비박을 하기로 했다. 산소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비박색 하나로 이 지독한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3시간동안 등반하면서 먹은 거라곤 캔디바 하나와 물 한 모금이 전부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최악의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뇌수종과 폐수종, 동상과 저체온증을 걱정하며 필사적으로 졸음과 맞섰다. 감각이 없어진 발가락과 모든 혈관이 작동할 수 있도록 계속 맛사지를 했고 생존을 위한 사투를 이어갔다. 짐은 아침해가 반드시 다시 떠오른다는 믿음 하나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박했던 자리가 바로 커니스 가장자리였다.

오싹 소름이 돋았지만 부인과 자식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하산에 집중했다. 산소가 없는 몽롱한 상태에서 영화의 슬로우 모션 동작처럼 흐느적거리는 위험한 하산 끝에 무사귀환 했지만 8천미터에서의 비박 후유증으로 기침과 폐렴, 늑막염, 폐색전이 복합적으로 겹쳐 헬리콥터로 K2를 탈출했다.

왼쪽 폐를 누르고 있는 조직제거 수술과 왼쪽 후두부와 횡경막의 파손으로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바뀌었다. 동상으로 발가락을 부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은 짐에게 담당의사가 “앞으로 고소등반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짐도 위험한 등반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후 건강이 원상태로 회복되면서 등반에 대한 욕구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짐은 의사의 충고와 경고가 제대로 맞는 진찰인지 여부를 확인해 봐야겠다며 데날리 등반에 나섰다. 비록 악천후로 등정은 못했지만 5,8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고 짐은 자신감을 완전하게 회복했다. 그때 데날리 베이스캠프에서 루 휘태커를 만났는데, 그는 짐에게 1982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합류할 것을 제의했다.

K2에서의 비박 후유증으로 침울해 있었던 가족들에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돌아온 짐의 모습은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짐은 가족들에게 에베레스트 원정대와 관련한 계획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그러자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의 꿈을 위해서 그 산에 언제든지 가세요.”

짐은 이후 1981년 데날리 윅커샘 월, 1982년 아콩카구아와 에베레스트, 1984년 에베레스트, 1989년 캉첸중가, 1990년 멘룽체, 1992년 데날리, 1993년 에베레스트, 1995년 파타고니아의 마운트 살미엔토, 1996년 볼리비아의 마운트 일리마니 등 도전과 위험에 중독된 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