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여성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치가 히말라야 8천미터급 자이언트 완등을 목표로 ‘Caravan of Dreams’ 발표했는데…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다. 산에서 죽는 것, 그것은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게르트루드 라이니쉬ㅣ출판년도 2001년ㅣ쪽수 192쪽ㅣ출판사 카레그
■게르트루드 라이니쉬ㅣ출판년도 2001년ㅣ쪽수 192쪽ㅣ출판사 카레그

“당신이 열망하는 꿈을 이루면서 산다는 것은 그에 상당한 위험과 어려움 없이는 결코 성취되지 않습니다. 단지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어집니다. 자유는 내 삶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는 산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산을 등정하고 무사히 하산해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산 또는 자연을 정복해서, 또는 그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내 안의 약점과 단점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입니다. 내가 1년 내에 8개의 고산을 등정하겠다는 이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는 내 자신의 꿈속에서만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로 그 위험 요소들에 대해 도전하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내 자신과 불가능한 대상의 변방에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Caravan of Dreams’에 도전할 겁니다.”

위 내용은 폴란드의 여성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치가 히말라야 8천 미터급 자이언트 완등을 목표로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발표한 것이다. 그녀의 9번째 대상인 칸첸중가를 등반 중이던 1992년 5월 12일, 등정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 실종되었다.

1943년 2월 4일, 리투아니아의 플런쟈니에서 출생한 반다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군을 피해 폴란드에서 이주한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의 연금으로 항상 궁핍했고 근근이 살아갔다. 염소의 우유를 먹고 자란 그녀는 이 염소우유 때문에 건강체질이 되었고 억척스런 사람이 되었노라고 훗날 회상했다. 16세 때 과학기술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또래의 친구들이 영화배우 등에 열광할 때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수학과 물리, 화학에 관심이 더 깊었다. 장학금은 가사에 보태고 과외교사를 하며 자신의 용돈을 충당했다.

18세가 되던 1961년, 폴란드 남부의 스콜키라는 암장에서 친구의 소개로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한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졌다. 매주 스콜키를 찾았고 등반가로서의 능력과 내면의 산을 성숙시켜 나갔다. 1962년에 등산학교를 졸업했는데 등산학교 강사들이 보수적이어서 여성 수강생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끔찍한 등반사고 사진들을 보여 주며 겁주기 일쑤였고, 클라이밍은 남자들의 스포츠고 여자의 신체구조에는 적절치 않다며 배타적으로 상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최고 난이도인 ‘R’ 루트를 등반하고 있었고 1964년에 알프스로 원정등반을 떠났다. 당시는 ‘철의 장막’으로 표현되는 동서냉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녀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돈이 없어 스키리프트나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못했고 오직 두 발로만 알프스 산군을 섭렵하면서 성공적인 히말라야등반의 요소인 체력과 인내를 키웠다.

1970년 4월, 반다는 폴란드 보건부 간부의 아들인 수학학자 보이텍 루트키에비치와 결혼하고 그해 여름에 최초의 원정등반인 폴란드-러시아 레닌봉(7,134m) 합동등반대원으로 선발되었다. 보수적인 남편인 보이텍은 등반에 깊이 빠져드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못하면서 3년 만에 이혼했다.

폴란드산악연맹에서는 히말라야등반대 파견을 위한 기금을 조성했고 체육부에서는 3년마다 국가규모의 원정대를 위한 대규모 지원을 실시했다. 당시 산악계에서는 여성대원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참가하는 데만 의미를 부여했지만, 반다는 등반 횟수가 늘어나면서 괄목할 만한 경험을 축적했다. 그녀는 자신의 단점인 고산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야간 단독등반을 반복했다.

또한 산에서의 죽음을 많이 목격했지만 자신의 죽음은 상상하지 못했고, 자신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오지 않을 것이고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산이 죽음을 각오할 만치 중요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감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등반의 위험적인 요소들이 그녀에게는 더 매력적이었다.

바람의 느낌과 바위냄새, 긴장 후의 휴식, 한 컵의 따뜻한 차는 사소하지만 무한한 시간의 의미와 기쁨을 주었다. 등반은 그녀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고 등반이 자신에게 선사하는 즐거움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클라이머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반다는 1973년에 처음으로 세 명의 여성으로만 구성된 원정대를 이끌고 아이거 북벽등반에 나섰다. 폴란드에서는 최고의 장비를 준비해 갔지만 아이거의 낙석과 악천후를 막기에는 형편없었다. 노스 버트레스 루트를 3일 만에 오르는데, 이 루트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초등하고 반다 팀이 재등한 루트로 이후 한동안 등정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어려운 루트였다.

반다는 등반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등반 중에 수시로 밀려드는 공포와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등정했더라도 만족하지 않았다. 루트를 개척해 나가며 판단하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두려움이 등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6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돌아온 반다는 뇌막염으로 입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산은 이제 끝이 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1978년 3월, 네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마터호른 북벽 동계등반대 대장으로 초등(여성등반대)하면서 재기에 성공했고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여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합동등반으로 공동대장인 헤를리코퍼가 반다를 부대장으로 지명하자 남자대원들이 반기지 않았다.

대원으로서 그녀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협조를 꺼려했으며, 의견 충돌이 있으면 거의 공격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여성대원이라고 등반의 보조역할자로만 대한다면 여성의 능력을 평가할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반다는 이런 분위기에 주눅이 들지 않았고 당당하게 타협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목표대로 등반을 진행시켜 나갔다.

10월 16일, 등정 시도에 나섰는데 같이 로프를 멜 남자 파트너가 나타나질 않았다. 결국 졸지에 단독등정에 성공하면서 일본의 준코 타베이와 티베트의 판통에 이어 세 번째 에베레스트 여성등정자가 되었고 최초의 유럽 여성등정자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이날은 폴란드의 캐롤 보이틸라가 교황 바오로 2세로 선출된 날이어서 반다는 국민적인 대환영을 받았고 이후의 등반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폴란드 국민의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일종의 ‘에베레스트’라는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1986년, 반다는 알파인 스타일로 K2에 다시 도전했다. 8천 미터 죽음의 지대에서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하며 아브루찌 루트를 통해 등정에 성공했는데, 여성 최초의 K2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반다는 자주 어려운 목표를 설정했다. 그것이 어려운 루트이든 쉬운 루트이든 예상하지 못하는 위험은 항상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위험의 한계를 벗어나 정상에 오르면서 무한한 시간의 환희를 경험했다. 단순히 등정의 기쁨이라기보다는 神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선 소중한 기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1988년, 반다는 칸첸중가를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등반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심한 상처를 받았다. 산에서의 생존을 위한 능력은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었지만 결코 산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산은 절대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산에서의 용기는 오히려 결점이 될 수도 있다. 반다는 자신의 파트너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밀려오는 고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냉정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통제하고 神, 또는 자연과 직접적인 교감을 이루는 것이 더 적절한 해결방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90년 5월, 반다는 가셔브룸1봉을 오르면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 자이언트 완등을 위한 프로젝트 ‘Caravan of Dreams’를 발표했다. 이미 여섯 개의 자이언트를 오른 반다가 나머지 여덟 개를 1년 안에 오르겠다는 계획이다. 사람의 신체가 고소순응이 완벽하게 되었을 때 등반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고 연속으로 오른다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너무 지치고 바빠 훈련할 시간조차 만들지 못했고, 한 시즌에 세 개의 등반을 진행시키기에 너무 늙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에베레스트’를 실현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대원들과의 불화와 갈등으로 여성 파트너를 찾아 봤지만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초오유와 안나푸르나만 등정한 채 ‘Caravan of Dreams’ 프로젝트는 연기되었다.

1992년 3월, 자신의 아홉 번째 8천 미터인 칸첸중가 등반을 위해 카를로스가 이끄는 멕시코팀에 합류했다. 폭풍설과 뇌우로 며칠을 베이스캠프에 갇혀 있다가 5월 7일에 마지막 등정시도에 나섰다. 5월 12일, 카를로스가 등정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8,300미터 지점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반다를 만났다. 그러나 이후 누구도 반다를 다시 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1989년 10월,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로체 남벽에서 추락사했을 때 반다는 산악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 산악인들이 등반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렸다.

모든 길은 시발점과 종점이 있다. 산악인들이 고산에서 사투를 벌일 때 현장에 가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 행위의 의미를 캐내려고 부심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그 행위가 바로 등반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열정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을 추모하기만 하면 된다.”

50세의 반다가 칸첸중가로 떠나기 전에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방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다. 산에서 죽는 것, 그것은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경험하게 되고 곧 익숙해질 것 같다. 나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 글 |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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