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라인홀트

사진설명=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탈리아의 등산가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 14개를 최초로 모두 정복한 인물로, 1980년 산소호흡기 없이 혼자서 등반했다. 메스너는 현존하는 인물이며 한국에도 방문하여 살아있는 전설의 산악인으로 많은 호응을 받고있다. 메스너 재단 제공
사진설명=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탈리아의 등산가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 14개를 최초로 모두 정복한 인물로, 1980년 산소호흡기 없이 혼자서 등반했다. 메스너는 현존하는 인물이며 한국에도 방문하여 살아있는 전설의 산악인으로 많은 호응을 받고있다. 메스너 재단 제공

<1편에서 계속> 제2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메스너는 주말마다 은행원인 동생 귄터와 등반을 함께 다녔다. 1968년 여름에 피아트 자동차를 구입한 메스너는 귄터와 함께 등반여행을 하며 토니 히벨러와 아이거 북벽 노스 필라 초등정에 성공했다. 1969년 대학에 입학해서 기계학을 전공하며 심도깊게 공부하고 있는데 티롤 산악계로부터 안데스 등반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안데스 화야시 산군의 예루파하 동벽을 초등하고 돌아온 메스너는 학업을 포기했고 등반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부모도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그는 바로 치베타 북벽과 마몰라다 남벽 직등 루트를 단독으로 도전했다. 그에게 거벽은 이미 거대한 바윗돌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는 오르가즘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

단독등반은 등반의 본질과 직등이라는 이상을 만족시켜줬고, “한 번 추락하면 다시는 추락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선사했다. 순간의 실수는 곧 마지막 동작이 될 것이다. 메스너는 위험한 지점에서 추락할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마치 생명이 무한대로 연장된 사람같이 움직였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이 지금 온 것은 아니다. 그는 반드시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밀려드는 육체의 두려움과 영혼의 공포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애당초 없었다. 그가 그렇게 용감해서가 아니라 죽음은 의문사항이 아니고 필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5세의 메스너는 알프스에서 50여 개의 초등과 20여 개의 극한 단독등반을 하면서 영역을 서서히 히말라야로 넓혔다. 1970년 5월, 칼 헤를리코퍼는 메스너와 귄터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원정대에 초청했다. 사진으로 본 눈 덮인 히말라야는 메스너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5,000미터의 수직 거벽 루팔벽은 몇 년간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3,6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순조로운 진행을 보이던 등반이 폭설과 눈사태로 3주간 지연되었다. 캠프5에 올라선 메스너는 다시 날씨가 악화되자 단독등반을 감행했다. 벽 상단부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데 15년간 자일파트너였던 동생 귄터가 나타났다. 귄터는 등반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으로 올라왔지만 지치지 않았고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고도를 높이자 안개가 짙게 깔려 루트 정찰이 어려워졌고 체력이 급속하게 떨어졌으며 휴식시간이 길어졌다. 귄터가 선등으로 나서며 정상으로 향한 능선에 붙었다. 귄터의 마지막 사진이 된 등정 사진을 찍고 하산을 재촉했지만 이내 어두워졌고 지친 상태에서 비박을 감행했다. 영하 30도에서 침낭도 없이 비박을 한 귄터가 심각하게 탈진상태를 보였고 몰아치는 폭풍우는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은 좀 더 쉬워 보이는 디아밀 벽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 환각상태와 탈진이 겹쳐져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귄터가 보이질 않았다. 먼저 내려갔는지 아니면 아직도 저 위에 있는지 판단이 흐릿했다. 디아밀 계곡에 도착한 메스너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정신을 차려 보니 역시 귄터가 없었다. 3일간 소리쳐 찾아보고 마지막으로 본 지점까지 가봤지만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귄터가 실종된 것 같지만 좀 더 기다리다가 계곡 아래로 내려갔고 5일 만에 원주민을 만났다. 말이 통하지 않는 원주민에게 입고 있던 옷으로 계란과 우유를 바꿔 먹었다. 동상으로 발이 부어올라 서 있지를 못했고 미친 사람처럼 걷다가 철수중이던 원정대를 만났다. 그는 귀국 후 6주일간 인스브루크대학병원에서 양발에서 2개씩의 발가락을 부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빌네스교회에서 7월 18일, 동생의 추모집회를 갖고 메스너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등반가와 모험가로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강연과 집필, 등산학교와 등산장비 컨설턴트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등반을 위한 시간과 경비를 확보하기로 했다. 1971년 9월, 인도네시아의 카스텐츠 피라미드 봉을 등정하고 돌아온 메스너는 우쉬 디메터와 사랑에 빠졌고, 1년 전 낭가파르바트에서 자신을 구해 준 원주민과 동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디아밀 계곡으로 다시 들어갔다.

4일간 참담한 심정으로 찾아봤지만 귄터는 없었고 오히려 메스너를 심적으로 편안하게 만들어 줬다. 귄터는 메스너 인생의 한 축에 머물면서 등반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 메스너는 1972년 4월에 마나슬루 남벽을 단독 초등정하고 우쉬와 결혼했다.

1977년, 6개월간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러닝으로 체력을 다지며 준비한 다울라기리 남벽 등반은, 예술가가 갑자기 어떤 대상을 보고 모티브를 얻듯이 메스너에게 가장 이상적인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6,000미터 지점에서 도저히 등반 가능한 선을 찾지 못했다. 바위가 푸석해서 확보물을 믿을 수 없었고 이런 고도에서 등반자끼리 서로 확보를 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신설로 인한 눈사태가 그들을 덮치자 메스너는 신속하게 하산을 결정했는데, 그의 등반인생 역사상 유일하게 포기한 등반이 되었다. 1978년 5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메스너는 낭가파르바트 서벽 단독등반에 나섰다. 하나의 계획이 이루어지면 다른 꿈을 곧바로 대치시키면서 줄기차게 등반에 몰입했다.

8,000미터 자이언트 벽에서 아이젠과 피켈만이 유일한 확보수단이었던 이 등반은, 비상시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진행된 죽음과의 레이스였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마지막 힘과 극도의 긴장에 의존해 하산한 그는, 탈진으로 반은 죽었고 동시에 새로 태어났다.

메스너에게는 불확실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도전 의지가 있다.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의해 루트를 개척해 나갔다. 모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며 탐험하듯이 그는 산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능력, 의지를 믿고 그 불확실성의 벽을 돌파해 나갔다. 불확실성은 그의 가장 강력한 등반의 동기이자 원동력이었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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