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너는 5세때 클라이밍의 기초를 배웠다.

■라인홀트 메스너ㅣ출판년도 1998년ㅣ쪽수 271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라인홀트 메스너ㅣ출판년도 1998년ㅣ쪽수 271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라인홀트 메스너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 남 티롤의 한적한 산골인 빌네스에서 보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없어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또래의 아이들과 몰려다니는 일이 그의 하루 생활이었다. 마을을 마치 성곽처럼 둘러싸고 있는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해 했다. 이곳 농부들에게 그러한 호기심은 반갑지가 않았다.

주말에 도시 사람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빌네스를 찾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행이나 관광이란 개념도 없었다. 거칠고 고립된 여건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하지만 메스너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교사생활을 했고 클라이밍을 즐겼는데, 메스너가 5세 때 미타그 샤르테 등에 데리고 다니며 낙석을 피하는 요령과 클라이밍의 기초를 가르쳤다.

메스너는 여기서 자신의 인생이 되어 버린 등산으로의 열정을 키웠다. 12세 때 클라이네 페르메다 동벽에서 현기증을 느꼈고 등반 가능한 루트를 찾지 못했지만, 그의 상상력은 점점 더 커졌고 집 근처의 바위들이 훌륭한 연습 장소가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여러 피치의 등반을 하면서 3지점 확보와 빌레이 보는 방법을 터득했고 선등도 곧잘 했다.

등반중에 피톤이나 스파이크 같은 확보물을 설치하며 올랐지만 선등자가 추락하면 후등자도 위험했다. 메스너는 이때부터 절대 추락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게 되었다. 800여 미터의 석회암에 다양한 크랙과 침니가 발달한 자스리가이스 북벽은 당시 메스너에게 퍼즐 게임과 같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거대한 거미를 연상시키는 이 북벽의 사진을 항상 갖고 다니면서 루트를 연구했다. 7월의 어느날 오후, 메스너는 아버지가 새로 사 준 헬멧과 마을의 대장장이한테 특별 주문제작한 피톤과 나일론 로프를 들고 동생 귄터와 함께 이 북벽 루트에 도전했다. 피톤 없이 등반했던 선조들의 등반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메스너 형제는 등정에 성공했고 유년기를 마감했다.

18세가 되던 1963년에 처음으로 6급의 빙벽 루트를 올랐고 그의 오랜 꿈이었던 퍼체타 북벽을 등정했다. 1965년 여름 메스너와 귄터는 돌로미테와 서부 알프스, 남 티롤의 많은 암벽과 빙벽 루트를 섭렵하며 경험을 축적해 나갔다. 메스너는 이때 “모험이란 단지 거리가 먼 곳에 있는 대상지를 찾아다니는 일이 아니라 확실하지 않은 미개척 대상을 찾아보려는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서는 메스너가 기술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직업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워져 있었고 이미 산에서 얻은 격렬한 경험에 중독되어 있었다. 어렵고 위험한 암벽등반을 하면서 생존하는 요령에 단련된 그는, 자신의 판단과 결정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반복적이고 주입식 교육이 맞지 않았다.

그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졌고 절친한 친구인 하이니 홀처와 치베타 벽의 많은 루트를 오르며 초등 루트도 여러 개 개척했다. ‘벽중의 벽’이라는 치베타 벽은 60년대 최고의 난이도 높은 암장으로 그 폭이 수 킬로미터나 되었고, 아이거 북벽 등을 등반하려면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다. 메스너는 이 치베타 북벽을 등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등반은 산과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강인한가를 시험하는 행위가 아니고 성공과 실패를 선택하는 대상도 아니며, 또한 그것이 중요한 가치도 아니다. 극도의 위험에 노출된 자신을 적절히 통제하고 극복하려는 용기만이 등반에서의 공포를 잊게 할 것이다. 어떠한 돌발사태가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급한 동작을 자제하고, 마음의 평정과 균형을 잃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벽 상단부의 홀드가 없는 페이스에서 불안정안 바위가 깨져 낙석이 떨어진다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인다. 손가락이 땀에 절고 온몸이 떨리겠지만 후회하거나 기도하지 않는다.”

1966년 10월, 메스너는 피츠데 치아바체 남벽의 단독등반에 성공했다. 많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느낌이었고 새로운 유혹과 열망에 흠뻑 젖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본 것이다. 다음해 2월, 아그네 북릉과 퍼체타 북벽 동계 초등에 성공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경이로움에 가득 차 올려다보았던 이 북벽을 혼합등반으로 하루 만에 오른 것이다.

당시 극한등반에는 인공기술등반과 자유등반이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등정을 위해 모든 가능한 인공 설치물을 이용하는 등반가가 있는가 하면, 산과 사람 사이에 부조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형성된 산에서의 어려운 조건들을 순수히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려는 등반가가 있다. 메스너는 초등이 아니고 재등인 루트를 등반할 때는 피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등반능력의 한계는 다양한 경험과 훈련에 의해 넓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미래의 등산발전은 이러한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순수한 방법과 직등으로 8천 미터의 고봉까지 선등할 수 있는 등반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상론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시도하고 도전해야 하는 숙제라고 주장했다. 메스너는 난이도가 6급이고 140여 개의 피톤이 필요하다는 치마 스코토니 남동벽을 장비없이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알프스에 다양한 루트가 개척되면서 볼트와 요세미티식 홀링등반이 성행했다. 메스너는 볼트가 없으면 개척이 불가능한 루트는 아예 포기했다. 자기보다 좀 더 뛰어난 사람이 볼트를 사용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과 수단으로 초등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그 루트가 직등이 되든 우회해서 오르든 1미터 1미터 고도를 높이는 행위가 볼트를 이용한 등정보다 의미가 크다는 것이었다.

1968년 1월말, 메스너는 셉 마이얼과 조카인 하인들과 함께 아그네 북벽 동계 초등에 도전했다. 심설과 크랙에 눈이 얼어붙어서 해머로 홀드를 만들어 가며 올랐다. 피톤과 줄사다리를 설치하면 쉽게 오를 수 있었겠지만 메스너의 등반 스타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자유등반하거나 철수하든가 택일했다. 이 북벽은 너무 스케일이 커서 고전적이고 순수한 방법으로는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그들은 서서히 지쳐갔고 사방은 수직의 세계였으며 눈은 또 줄기차게 내려 루트 정찰이 되질 않았으며 온통 그래픽 디자인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전에 사진으로 여러 번 봐두었던 북벽의 상태를 회상하며 방향을 잡을 뿐이었다. 침니마저 수직으로 뻗어있어 고통을 가중시켰고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박지도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철수할 분위기였는데 조그만 동굴을 발견했다.

다음날 셉이 선등했지만 지지부진했고 몬테 아그네의 그림자가 아랫마을에 드리워졌다. 북벽을 등반했기 때문에 해를 볼 수 없었고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비박을 하고 벽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탈진된 상태였고 앞으로도 600여 미터의 슬랩과 크랙, 오버행이 얼음과 눈에 섞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여전히 밝아왔지만 그림자뿐인 세계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 루트가 제대로 맞는 길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무언가 거부할 수 없고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이 닥쳐 등반을 중지시켜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였다. 다음날 그들은 동계 초등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편에서 계속>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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