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에르족은 안나푸르나를 등정한후 1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데이비드 로버츠ㅣ출판년도 2000년ㅣ쪽수 239쪽ㅣ출판사 사이먼 앤 슈스터
■데이비드 로버츠ㅣ출판년도 2000년ㅣ쪽수 239쪽ㅣ출판사 사이먼 앤 슈스터

1950년 6월 3일, 모리스 에르족(1919-2012)과 루이 라슈날은 힘겹게 안나푸르나 정상을 향했다. 라슈날은 발이 이상했고 동상에 걸린 것 같았다.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에르족에게 제의했지만 에르족은 혼자서라도 올라가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정상에 오른 에르족은 등정의 기쁨에 환호했고 프랑스 국기와 산악회 깃발, 기타 몇 장의 사진을 찍고 감동적인 순간을 만끽했다.

날이 저물고 폭풍의 조짐이 보였다. 몬순이 시작된 것이다. 라슈날은 조바심이 나서 계속 에르족에게 하산하자고 재촉하다가 지쳤고 그냥 짐을 챙겨서 하산했다. 좀 더 머뭇거리던 에르족도 곧 하산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라슈날을 쫓아 내려갔던 그는 갑자기 배낭을 벗어 놓고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그때 벗어놓은 장갑이 눈에 미끄러지면서 천 길 아래로 사라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배낭에 여분의 양말이 있어서 장갑 대용으로 쓸 수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추위에 노출된 채 하산했고 치명적인 동상에 걸리게 된다. 간신히 캠프5에 도착하니 리오넬 테레이와 가스통 레뷔파가 텐트 한 동을 더 설치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르고 하얗게 나무같이 딱딱해진 그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고 테레이와 레뷔파는 2차 등정 시도를 포기하고 밤새 그들을 위해 극진히 간호했다.

세계 최초의 8000미터 급 등정인 안나푸르나 초등이 이루어진 지 50년(출판 당시)이 되었다. 그때 아홉 명의 대원 중 현재 생존한 사람은 에르족 대장 뿐이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초등정은 이제 와서 의혹을 받고 있고 프랑스 국민의 영웅이었던 에르족은 비도덕적이고 부적절한 조치로 곤혹스러움에 처해 있다. 1950년까지 히말라야는 영국과 독일, 미국이 주축되어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바트, K2에 22개의 등반이 시도되었다.

프랑스는 히말라야 등반에 관심이 없었지만 등반 능력에 있어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쟁쟁한 등반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찰등반 없이 시도한 8000미터 급 안나푸르나를 단번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국민의 암울하고 참담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안나푸르나 초등정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분위기도 반전되었으며, 그 어떤 스포츠에서의 승리보다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30회의 사진전과 300회가 넘는 강연회 등으로 에르족은 일약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1951년 11월 출판된 초등정 보고서 《Annapurna》는 1년 내내 비소설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40개 국가 언어로 번역되었고 약 천만 권이 판매되었다. 에르족은 샤모니 시의 시장이 되었고 드골 정부 때는 청소년스포츠 장관을 역임했다. 81세의 영웅 에르족의 이름은 프랑스 국민 모두에게 친근하지만 라슈날과 테레이, 레뷔파의 이름은 5내지 7퍼센트의 국민만이 알 뿐이다.

1996년, 라슈날의 일기를 재편집한 책이 나오고 같은 해 레뷔파의 전기가 출판되면서 안나푸르나 초등정 기록과 에르족 대장은 극심한 의혹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샤모니에서 등산서적 출판사를 운영하는 미셀 게린은 라슈날이 1956년에 발표한 등반기 《Vertigo Notebooks》을 재편집한 책을 발표했다.

라슈날의 원고를 뒤늦게 발견했지만 이미 출판된 등반기와는 상당히 달라서 삭제되지 않고 수정되지 않은 책을 발표한 것이다. 게린은 “《Annapurna》는 잘 치장되고 각색된 신화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낭만적인 꿈으로 이루어진 등정일 뿐이다”라며 50년 전의 진실은 에르족이 밝힌 것보다 더 어둡고 복잡하고 애매하다고 폭로했다.<2편에서 계속>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저작권자 © 데일리비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