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히말라야위원회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비한 훈련등반으로 초오유 등반대를 십튼에게 맡겼다.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를 하던 아버지를 3세 때 여윈 에릭 십튼(1907-1977)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인도와 유럽을 자주 여행했다. 이때의 영향으로 십튼은 방랑생활을 즐겼고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십튼이 9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정식교육을 시키려고 런던으로 갔지만 글 공부가 부족했던 그는 읽기와 쓰기가 느렸고 실독증세로 고생했다.
실독증은 독서 장애자가 문자를 보고도 발음으로 이어지는 연상작용이 되질 않고 정확하게 듣지를 못하는 것으로, 결국 외국인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영어 강좌를 수강했다. 이 학교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와 마운트 조툰하이멘을 오르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줄기차게 지배하는 산으로의 뜨거운 열정과 자신감을 찾게 된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입학시험에 계속 떨어졌는데, 당시 대부분의 일류 등반가들이 명문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어서 그에게 두고두고 열등감의 단초를 제공했다. 19세가 되면서 십튼은 알프스의 ‘라메이주’ 횡단을 포함한 수많은 암벽등반을 했고 알피니스트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쌓았다.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학력이 부족해서 어려웠고 대신 식민지 사업인 커피 재배업을 하기 위해 케냐로 갔다. 케냐는 농토가 풍부하고 기후도 적당했다. 정착한 백인들은 부유한 집안의 2세들이 대부분이었다. 십튼의 농장은 마운트 케냐와 고원지대 사이에 있어 그의 정서를 만족시켰다. 식민지 주재 관리로 있던 윈 해리스로부터 마운트 케냐 등반을 제의받고 15명의 포터와 함께 등정에 성공했다.
이런 오지에서 루트를 개척하려는 의지는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었고 포기하고픈 마음을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후 십튼의 등반 스타일이 되었다. 농사가 잘 되고 돈도 많이 번 십튼은 1929년 4월, 우간다 국경으로 이주해서 주변의 산과 숲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운트 케냐의 등정 소식을 신문에서 본 영국의 빌 틸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틸만은 1919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이곳에서 역시 농장일을 하고 있었는데 십튼보다 10살 위다. 틸만과 십튼의 만남은 킬리만자로와 마운트 케냐 쌍봉 횡단, 루웬조리 등의 등반을 통해 세기적인 자일 파트너로서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들의 등반기가 <알파인 저널>과 <지오그래픽 저널>에 소개되면서 등반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고 인도의 카메트원정대에 선발되었다.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히말라야 트레킹을 즐기지만, 당시 히말라야에 간다는 것은 화성탐사를 하는 것과 같이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할 정도였다.
히말라야에 초행길인 대원들은 대자연의 광활함과 고요, 눈사태 등에 매료되었고 고산에서의 추위와 두통, 불면에 시달리기도 했다. 1931년 6월, 십튼은 자신의 첫 번째 최고봉에 오르게 되었고 몇 주간 티벳 국경의 미 개척지를 탐험하며 진정한 모험의 세계를 만났다.
1932년 티벳이 서방 세계에 개방되면서 영국에서는 1933년에 에베레스트 원정계획을 잡았고, 십튼은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났다. 전에는 등반대원을 선발할 때 탐험가나 연구가, 과학자 위주로 선발했지만 이번에는 알프스에서의 등반경험이 풍부한 전문 클라이머 출신이 많이 포함되었다.
대부분 대학 출신이었지만 십튼은 뛰어난 체력과 재능으로 이미 등반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다아질링을 거쳐 6주간의 캐러밴을 하면서 이곳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문화가 자신들의 문명으로 영향을 받고 훼손되는 현실을 염려했다. 히말라야의 건조한 기후와 날씨로 많은 대원들이 고생했고 베이스캠프에서 노스콜까지의 구간은 대부분 십튼과 프랭크 스마이드가 개척했다.
등반방식은 캠프를 계속 설치하면서 전진하는 전형적인 극지법이었는데, 1970년대에 알파인 스타일 방식이 보급되기 전까지 지배적인 형태였다. 2차 등정 시도에서 윈 해리스와 고소포터들이 8,350미터 지점에 캠프6를 설치하는데 성공했고, 1924년에 실종된 말로리나 어빈의 것으로 보이는 피켈을 발견했다.
하지만 심설과 수직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하산하고 만다. 스마이드는 3차 시도에서 8,560미터까지 도달했는데 역시 심설로 포기했다. 여기서 십튼은 티벳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인생의 방향을 탐험가로 잡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대학을 나와 일자리와 고정수입이 보장되어 여유롭게 등산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는 항상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노후의 안정된 생활과 명예를 위해 탐험가의 길을 선택했다.
십튼은 당시 많은 접근이 시도되었던 난다데비 탐사등반을 계획하고 아프리카에 있던 틸만과 합류했다. 어렵고 위험한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자금이나 장비, 좋은 날씨가 아니라 체력이나 정신력이 서로 비슷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높은 동료의 선택이라는 것을 십튼은 잘 알고 있었다.
십튼과 틸만은 성격을 제외하고는 많은 점에서 일치했다. 1934년, 5명의 포터를 고용해서 5개월간 최소한의 짐으로 소규모 등반을 떠났다. 리쉬협곡으로 루트를 개척하며 위험한 절벽을 통과하고 강을 수도 없이 건넜고 루트가 정확하다는 확신도 없이 어렵게 전진만을 반복했다. 난다데비 성역에 처음으로 사람의 발을 디디면서 틸만과 십튼은 깊은 감회에 빠졌다.
난다데비의 신비스런 모습은 어떤 형태의 사진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푸른 초원과 양, 들꽃들은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난다데비의 북쪽과 빙하의 흐름을 관찰했고 바기라티빙하와 아르와계곡, 강고트리빙하의 탐사를 진행했다. 전진을 계속할수록 그들의 고립은 더 깊어지고 전혀 다른 세계에서의 두려움도 커졌지만, 틸만과 십튼의 우정과 신뢰는 더 깊어졌고 10살의 나이차를 극복하며 서로 애칭을 부르게 되었다.
십튼은 이 등반의 성공으로 탐험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고 영국왕립지리원에서의 강연으로 격찬을 받았으며, 1935년 에베레스트 정찰원정대의 대장으로 선임되었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의 리더십과 탐험능력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36년 5월, 십튼은 틸만과 두 명의 지리과학자, 여섯 명의 셰르파을 이끌고 카라코람 북부의 샥스감 지역을 탐험했다. 이 탐험 후 그는 《Blank on the Map》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완성도가 높은 성공작이었다.
지도에 ‘미탐사’라고만 표기된 지역에서 4개월간 하루에 1인당 900g이라는 최소한의 식량으로, 빙하의 흐름과 강줄기를 파악하고 지도를 완성했으며 영국왕립지리원에서 ‘페이트런 메달’을 받았다. 십튼은 단일 봉 등정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탐험과 지도제작으로 자신의 부족한 학력을 보완하고 싶어했다.
1939년에 16개월간의 카라코람 탐험계획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단체에서 후원을 했다. 그는 과학자와 의사, 식물학자 등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조직해서 훈자계곡과 비아포빙하, 오그르 등 2,800㎢의 지역을 탐사했고 많은 고개를 넘었다. 1940년 8월, 십튼은 타클라마칸사막과 타림분지, 중앙아시아 산군 사이에 있는 캐쉬가르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학력이 낮은데도 처음으로 직업을 얻은 것이다. 캐쉬가르는 중앙아시아의 전략도시로 200명이 근무하는 총영사관의 규모와 시설이 화려했고, 전쟁 중이었기에 그는 국가간의 음모와 첩보전에도 개입했다.
1952년 스위스팀은 최정예 대원과 텐징 노르게이라는 뛰어난 셰르파와 함께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을 통과해서 8,600미터 지점까지 도달하고 철수했다. 영국 히말라야위원회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비한 훈련등반으로 초오유 등반대를 십튼에게 맡겼다.
십튼은 고소의학과 산소기구 시스템, 의류와 장비의 실험을 목적으로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초오유 북서릉 6,900미터 지점의 빙벽을 넘지 못하고 대원들의 발병과 악천후, 적절치 못한 식량계획으로 철수했다. 이 등반의 실패는 다음 해에 십튼이 에베레스트 등반대장에서 교체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번 등반이 비록 훈련과 각종 실험이 목표였지만 대원들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고, 그의 성격과 운영상의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히말라야위원회는 십튼의 리더십에 이의를 제기했고 신중하게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해인 1953년에 있을 엘리자베스여왕의 대관식에 맞춰 등정을 계획해야 했고 프랑스가 1954년, 스위스가 1955년에 에베레스트 등반허가를 받아놓아서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초등정의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1952년 7월, 히말라야위원회는 십튼을 초청하여 초오유 등반보고를 받고 그의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위원회 명예서기의 친구이자 알프스와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있고 보병 연대장인 존 헌트가 비밀리에 등반대장 후보로 등장했다.
히말라야위원회는 십튼을 등반대장으로 헌트를 부대장으로 했다가, 베이스캠프까지는 공동대장으로 그 후는 헌트가 단독 대장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헌트를 부대장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십튼에게는 무척 당황스런 통보였고 그는 등반대장 직을 자진 사퇴했다.
1962년, 십튼은 피츠로이와 세로토레가 있는 파타고니아의 남부 아이스캡을 횡단하는 계획을 세웠다. 안데스에서의 등반 경험이 풍부하고 파타고니아의 지독한 날씨에도 적응이 된 두 명의 젊은 칠레 등반가와 네 명의 대원을 이끌고 푼타아레나를 출발했다. 60일간 340kg의 짐을 이동시키며 전진하는데 50대 중반의 십튼에게는 고단한 등반이 되었다.
그의 나이보다 반이나 젊은 대원들과 등반했지만 자신의 짐은 스스로 해결했다. 오직 콤파스에만 의지하여 탈출계획과 방법도 없이 눈썰매를 끌었고, 다이어트 수준의 식량으로 극심한 눈보라와 허리케인같은 바람 속을 뚫고 탐험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 그는 남미의 다윈지역을 탐사했고 마운트 다윈 등반, 비글해협 탐사, 마운트 버너 정찰등반을 했다.
십튼은 60대를 주로 강연과 트레킹 가이드, 항해를 하며 보냈다. 1965년에는 영국의 알파인클럽 회장에 선임되어 젊은 감각으로 변화를 꾀했고 클럽을 활성화시켰다. 1976년 12월, 부탄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십튼은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면서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목표를 달성하는 삶으로 가득찼던 십튼의 인생은, 1977년 3월 영국의 폰트힐호수에서 한 줌 재로 마감했다.
■ 글ㅣ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