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스커는 모험가이기 때문에 등반과 가정이라는 두 가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태스커는 롱북계곡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저자 마리아 코피ㅣ출판년도 1990년ㅣ쪽수 192쪽ㅣ출판사 샤토앤 윈더스
■저자 마리아 코피ㅣ출판년도 1990년ㅣ쪽수 192쪽ㅣ출판사 샤토앤 윈더스

클라이머가 등반 중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미사려구도 정당화, 또는 합리화 될 수가 없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더 크고 회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의 등산가인 조 태스커는 마리아 코피(저자) 삶의 중심이었지만 그의 유일한 관심과 목표는 등반이었다. 태스커는 코피가 자신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고는 했지만 등반과 관련된 주요 문제는 그녀와 상의하지 않았고 코피에게 주어진 조건 이상의 어떠한 약속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등반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코피에 대한 감정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가 보내는 편지는 형식적이고 초연한 상태의 무미건조한 내용들뿐이었다. 코피의 답장 역시 일상적인 뉴스로 채워졌고 그에 대한 감정도 자연히 통제되었다.

태스커와의 만남은 1979년 말 영국 맨체스터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친구집에 들렀다가 두나기리봉 등반을 얘기하고 있는 태스커를 처음 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았고 대화를 오래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운명적으로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코피는 남편, 또는 남자 친구가 자신들의 꿈을 찾아 등반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여자들의 근심과 긴장감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 행복과 함께 더 큰 고통과 시련, 이별이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감정의 폭이 혼란스러워졌지만 만난 지 6주일이 지나면서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태스커가 K2봉 등반을 준비하는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코피의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사랑은 깊어만 갔다. 코피의 생활방식도 많이 변했다. 그의 식사를 일일이 챙기며 일정을 관리하느라 자신의 일(베트남 난민구호소)은 멀어졌고, 집에 남아서 편지만을 기다리는 등산가의 애인으로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K2봉 원정등반에서 돌아온 태스커는 심하게 지쳐 있었다. 겨우 살아서 돌아온 듯 육체적으로 황폐해져 있었고 밤마다 추위와 눈사태의 악몽에 시달렸다. 체중이 많이 감소했고 지옥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상을 자주 갖게 되었고 고통스러워 했다.

태스커는 기력을 회복하면서 3개월 후에 있을 에베레스트 등반 준비에 다시 열중했다. 이 3개월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었을 것이다. 태스커는 결혼, 또는 가정주부를 원치 않았지만 코피와 함께하는 모든 것에 만족했고 즐거워했다. 코피도 그와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살아야 할 인생의 방향을 찾은 것 같았고 그만큼 더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껴본 상대도 없었다.

태스커는 위험 속에서 활동하는 모험가이기 때문에 등반과 가정이라는 현실의 두 가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위험한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바다를 좋아했다면 멀고도 긴 단독항해를 즐겼을 것이고 전쟁이 났다면 특수임무를 맡은 특공대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해하는 인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태스커가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것이, 산에서 죽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크고 빈도수가 높다”고 했는데, 코피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과 사랑에 빠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를 위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코피가 살아 있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용기와 지혜, 결단력, 자신의 삶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코피를 이끌었고, 오히려 그런 그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1982년 2월, 등반 출발일이 가까워지면서 태스커는 《세비지 아레나》(1982년 유고집으로 발간)의 원고 마무리에 전력을 쏟았다. 코피는 그에게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얘기를 꺼냈다. “이번 등반이 끝나면 결혼해서 정착하자”고, 하지만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새로운 등반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코피는 한결 편안해졌다.

5월 말, 집안정리를 하고 있는데 태스커와 그의 영원한 자일파트너였던 피터 보드만이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에베레스트 동북동릉 8,200미터 지점에서 캉슝페이스(동벽) 쪽으로 추락한 것 같다는 소식이다. 순간 어둡고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떨어지는 듯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다.

그들이 과연 추락했나? 로프로 서로 묶여 있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끌어 당겼나? 바위나 얼음에 부딪쳤을까. 서로 끌어안고 잠 자다가 얼어 죽었나?(보드만은 1992년 일본팀에 의해 동북동릉에서 움크린 채 죽은 시신으로 발견됨)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보드만의 부인인 힐라리로부터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코피는 이 제안이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82년 8월 30일, 그들이 티베트로 떠난 지 6개월 만에 보드만의 부인과 태스커의 애인은 그들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여행에 나섰다. 캉슝페이스가 바로 보이는 카르타계곡과 6,400미터 지점의 캠프3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고소순응이 잘 될지 모르겠지만 출발 전 훈련을 위해 힐라리와 함께 스위스의 3,000미터급 봉우리를 등반했다.

라사까지의 긴 여정을 통해 코피는 태스커의 흔적을 찾는데 열중했다. 그가 앉았을 법한 호텔의 의자와 가게, 식당, 사원 그리고 티베트 사람들. 그와 함께 있었던 지난 날들이 떠오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서서히 감정이 정리돼 갔다.

시가체를 지나고 에베레스트가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트럭을 세웠다. 태스커와 보드만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능선이 보였다. 코피와 힐라리는 에베레스트가 주는 경이롭고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히며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캉슝페이스가 가깝게 보이는 계곡에서 케른을 쌓고 들꽃 다발과 캔맥주 두 개를 올렸다.

오랜만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들의 영혼이 어루만져지는 듯했다. 롱북계곡에 들어서자 웅장한 에베레스트가 나타났다. 그동안 가졌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이 산으로 이끌었고 왜 그들은 한계를 뛰어 넘어 과감히 도전했을까”하는 의문들이 풀려나갔고,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고 캠프3까지의 등반을 시작했다. 고소증세와 크레바스를 피하느라 전진이 더디었다. 한 발 딛고 쉬고를 반복하면서 동북동릉이 가장 잘 보이는 캠프3에 도착했다. 그들은 태스커와 보드만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려보았지만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소리쳐 울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다.

태스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모든 것과 작별을 고했다. 코피가 고소증세로 겨우 텐트에 들어가 눕자 놀랍게도 힐라리가 텐트 주변에서 포장되어 있는 ‘파나돌’(진정제)을 발견해서 가져왔다. “태스커와 보드만은 우리가 여기에 올 줄 알고 미리 이 약을 남겨 놓은 거야”라며 코피는 이 약을 먹고 겨우 잠을 청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태스커와의 관계가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서 분노 없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태스커는 롱북계곡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코피 앞에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긴 인생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 낯선 여행은 벌써 시작되었다.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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