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서산책]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⑪
[산서산책]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⑪
  • 호경필 전문위원
  • 승인 2018.11.2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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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이 바닥나 자신들을 충실히 이끌었던 개들을 잡아먹으며 104일 만에 1,025km를 돌아 귀환했지만 세 명의 대원이 실종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 저자 미렐라 텐데리니, 마이클 샌드릭 공저ㅣ출판년도 1997년ㅣ쪽수 188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 저자 미렐라 텐데리니, 마이클 샌드릭 공저ㅣ출판년도 1997년ㅣ쪽수 188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K2봉은 1954년 7월 31일, 히말라야 8천미터 자이언트 중에서 네 번째로 초등정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산악회의 꼼빠뇨니와 라체델리는 110년 전인 1909년에 개척된, 지금은 K2봉에서 가장 고전적인 루트가 된 아브루찌 능을 따라서 정상을 향한 길을 열었다. 이 아브루찌 능을 개척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탐험가 아브루찌 공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경이로운 등반과 탐험으로 명성을 떨쳤다.

1873년 1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그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1861~1946년)의 손자로 당시 아버지는 스페인 왕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사망하자 아버지는 자식들을 해군군사학교에 보냈다. 아브루찌 공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소위로 임관되었고 1년 반이 걸리는 대서양과 태평양 항해를 떠났다. 이 항해 도중 아버지가 죽고 정식으로 아브루찌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서부 알프스의 암벽들을 섭렵하던 그는, 1894년 체르마트에서 우연히 40세의 알프레드 머메리를 만났다. 머메리가 1879년에 초등정한 마터호른 츠무트 루트는 그때까지도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아브루찌 공은 머메리에게 가이드를 부탁하고 8월 27일, 머메리가 선등하여 재등에 성공했다. 아브루찌 공은 이 등반이 끝난 후 머메리의 추천으로 영국의 알파인클럽에 가입했다.

머메리는 낙천적이고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표현했지만 아브루찌 공은 조직적이고 꼼꼼하고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머메리가 자신을 왕족의 사람이 아니라 동료 클라이머로 대해 주는 데 항상 존경했고 우정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다음 해 8월, 머메리는 낭가파르바트 등반 중 사망했고 아브루찌 공은 친구를 위해 낭가파르바트 등반계획을 세웠지만 인도에 전염병이 돌아서 포기했다. 대신 그는 다섯 번의 도전에도 등정에 실패한 알래스카의 세인트 엘리어스(5,489m) 원정등반을 준비했다.

1897년 7월, 24세의 아브루찌 공은 알프스 가이드를 포함한 10명의 대원과 미국인 선원, 학생, 노동자로 선발된 10명의 포터, 그리고 이들이 50일 동안 버틸 수 있는 3톤의 식량과 장비를 썰매에 싣고 빙하지대를 횡단하는 캐러밴을 시작했다.

대원 중에는 이탈리아산악회의 창립자 퀸티노 셀라의 조카인 비토리오 셀라가 사진담당으로 참가했는데, 그는 38세로 당시 세계적인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등반부터 셀라는 아브루찌 공의 거의 모든 등반에 참여했고 말년까지 아브루찌 공과 깊은 우정을 나눈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엘리어스 봉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등반은 아니었지만 짙은 안개와 폭풍우, 폭설, 추위, 고소, 크레바스와 눈사태의 위험으로 전진이 더디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악천후로 이 봉은 50년이 지나서야 재등이 될 정도였다.

당시에는 등반 대상지가 많지 않아 엘리어스가 인기가 있었지만 세기가 바뀌고 네팔과 티베트 지역이 서방세계에 개방되면서 점차 대상지가 다양해졌다. 7월 31일, 엘리어스 초등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 온 그는, 최초의 이탈리아 원정등반대의 대장으로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아브루찌 공은 훈련실습선에서 근무하다가 스웨덴 사람이 기구를 타고 북극을 횡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극등반대를 조직했다. 이미 알래스카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한 그들은 기술적인 능력과 체력, 항해술 모두가 검증된 상태였다. 북극의 기후와 지형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과 실험을 하기 위해 대서양의 스피츠 베르겐 군도와 시베리아로 갔다.

장기간의 고립을 견딜 수 있는 긍정적이고 협동심이 강한 20명의 대원을 선발했고, 3개월간 1,931km를 전진하는데 121 마리의 개를 이용하는 계획을 세웠다. 1899년 8월, 북위 80도 지점의 테프리츠 베이에 도착했다. 떠다니는 빙하에 배가 부딪쳐 침몰의 위기를 넘겼지만, 아브루찌 공은 이때 손가락 절단수술을 받는 바람에 부관인 카그니가 등반루트를 개척하기로 했다.

장기간의 단조로운 생활과 반복되는 작업으로 무기력해졌고 동상에 걸리는 대원이 늘어났다. 동상과 설맹, 추위에 탈진된 대원들은 1900년 4월 25일, 북위 86도 지점까지 도달하는 기록을 세우고 철수한다. 그러나 짙은 안개와 설맹으로 길을 잃고 식량과 연료가 바닥이 났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충실히 이끌었던 개들을 잡아먹으며 104일 만에 1,025km를 돌아 귀환했지만 세 명의 대원이 실종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하며 외교순방을 하던 그는, 나일강의 근원지로 많은 탐사가 시도되고 있는 아프리카 자이레의 루웬조리(4,829m) 등반을 준비했다. 1906년 4월, 세인트 엘리어스와 북극을 함께 등반했던 셀라와 알프스 가이드가 포함된 12명의 대원, 300명의 포터와 군인은 80일간의 식량을 싣고 출발했다. 적도의 열기와 살인적인 폭풍우, 코끼리와 사자의 위협을 뚫고 그들은 루웬조리 지역의 4,500미터 이상인 14개의 봉을 모두 초등정했다.

영국령으로 있는 발토로빙하의 K2 등반허가를 받은 아브루찌 공은 1909년 3월 26일, 봄베이를 향해 출발했다. 예전의 등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치밀한 연구와 조사를 마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5월 18일, 알프스 가이드를 포함한 12명의 대원과 260명의 포터, 5톤 분량의 식량과 장비를 이동시키며 발토로빙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들은 폭설과 추위를 극복하고 정상을 향한 루트개척에 힘썼지만 남동릉 6,200~6,700m 지점까지 도달하고 철수했다. 이때 개척한 루트가 ‘아브루찌 능’으로 지금은 K2 등반의 가장 일반적인 루트가 되었고 이로부터 45년이 지난 1954년 7월, 아브루찌 능을 통해 초등정이 되었다. 좀 더 높은 고도에 도전하고 싶었던 아브루찌 공은 근처의 초골리사(7,654m)에 이른다. 7월 1일, 5,071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그는 폭풍과 심설을 뚫고 고도를 계속 높였다.

그러나 크레바스와 눈사태, 악천후로 더 이상 전진을 못했다. 고도계를 보니 7,498m, 당시 인간이 도달한 최고의 높이였다. 이때까지 인간은 6천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6,400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9일동안 밤을 보냈다.

1914년 6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브루찌 공은 연합국 함대사령관으로 맹활약을 했고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왕가의 심한 견제를 받자 1917년 12월, 해군제독 직을 사퇴하고 아프리카의 소말리랜드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1918년 그는 생산과 분배, 소유를 공평하게 하는 농촌공동체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투자를 유치했다.

이 계획은 원주민에게 희망과 믿음의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사업으로 학교와 교회, 병원과 가옥을 짓고 수로와 발전소, 공장,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26년 3천 명의 소말리아와 2백 명의 이탈리아 사람, 16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된 ‘듀크 아브루찌 빌리지’가 건설되었다.

아브루찌 공의 탐험은 계속되었다. 1928년 10월, 55세의 아브루찌 공은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랜드로 이어지는 강의 근원을 찾기 위해 100일간 1,400km를 종단하는 웨비-쉐벨 탐험을 계획했다. 이 탐험으로 웨비-쉐벨의 발원지를 발견했고 지도가 완성되었으며 우주천문학, 측지술, 기상학, 수로학, 열대지방의 질병, 그리고 인류학에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탐험은 그에게 탐험 외의 또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소말리랜드의 농촌사업을 발전시키고 원주민에게 무한한 희망을 심어준 것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험에 대한 꿈을 이룬 사실 등이다.

하지만 웨비-쉐벨 탐험을 마친 1929년 가을, 그에게서 전립선 암이 발견되었다. 수년간 당뇨와 풍토병에 시달려왔지만 이번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193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강연과 연구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6년 소말리아의 정치 불안으로 약탈과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이 성행했다.

그러자 종손인 아메데오가 아브루찌 공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이장하려고 찾아왔다. 그러자 원주민대표가 만류했다. “우리의 선조들이 죽으면 아브루찌 공 옆에다 묻었고, 또한 우리가 죽으면 그의 곁에 묻힐 겁니다. 그는 항상 우리를 보호했고 앞으로도 우리를 보호할 겁니다. 이곳은 그와 우리들의 성지입니다.

” 아메데오는 결국 이들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의 아저씨는 탐험가였고 아프리카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선택한 그의 마지막 휴식처였다”라며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했다.

글ㅣ호경필(에코로바 커뮤니티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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