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칸 신정부도 군부에 자유롭지 못해
-군부, 70년 파키스탄 정계를 좌지우지
-나와즈 샤리프 前총리, 군부에 의해 축출
-임란 칸, 군부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어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해

임란 칸을 지지하는 시민. (사진=연합뉴스)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새 지도자 아래, 새로운 파키스탄이 가능할 것인가?

전직 크리켓 선수 임란 칸은 지난해 7월 파키스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총리로서 연립 정부를 이끌게 됐다.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연설과 ‘새로운 파키스탄’을 건설한다는 프로젝트로 칸이 이끄는 정당은 일약 원내 제 1당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파키스탄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군부의 지원 없이는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 군부의 뜻에 반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어김없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렇게 파키스탄은 1947년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약 30년간 파키스탄을 통치했다. 2008년 민정 이양을 통해 군부는 더 이상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 밝혔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7월 25일에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은 지금까지 치러진 여느 선거보다 군부의 막대한 영향력 아래 진행됐다. 국내외 언론은 번갈아가면서 파키스탄 의회를 장악했던 파키스탄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이하 PPP)과 파키스탄무슬림연맹(Pakistan Muslim League·이하 PML-M) 외에 제3의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정당을 이끄는 인물이 전직 크리켓선수 출신의 잘 생긴 총리임에 주목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임란 칸과 파키스탄 군부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파키스탄의 리더십 변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2008년은 파키스탄 군부와 그들의 핵심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총리가 정권을 내려놓은 해였다. 

◆ 파키스탄 정계를 지배해온 군부

2008년 치러진 선거에서는 순식간에 민주적인 권력 이양이 이뤄졌다.

파키스탄인민당은 창당자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의 암살에 따른 동정여론 덕택에 2월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베나지르 부토는 과거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가 스스로를 군부의 압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상징적 존재로 묘사한 것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딸’을 자처해왔다.

이는 어렵지 않았다. 아웅산 수치와 마찬가지로 베나지르 부토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역시 1971년 총리직에 올랐으나, 군부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옥중사한 공통점이 있었다. 파키스탄 국민들은 늘 부토를 그리워했고, 베나지르 부토의 인기는 많은 부분 그 아버지의 인기를 대물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부토 여사의 암살은 다시 한 번 PPP를 위한 ‘순교’로 작용했다.

이에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 역시 결코 유능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 5년은 파키스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임기를 끝낼 수 있었던 기간이었고, 그 이후에는 보수 성향의 PML-M이 쉽게 집권할 수 있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포스터 왼쪽)와 베나지르 부토(포스터 오른쪽)을 그리워하는 파키스탄 국민들. (사진=연합뉴스)

군부로써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다면, 정치가 및 시민으로써는 더 이상 군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 노팅엄 대학교의 캐서린 아디니 교수는 “PPP의 민주 정부가 임기를 다 할 무렵 군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전면에 나서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해석했다.

일반적으로 파키스탄에서 군부는 ‘체제(Establishment)’라고 지칭된다. 군사첩보기관인 파키스탄 정보부(ISI)는 특히 막대한 예산과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이 시기를 시점으로 더욱 은밀하면서도 강력해졌다. 과거 한국 군사정권 시절 ‘중정’이나 ‘안기부’의 권한이 무한정으로 확대되었던 맥락과 일치한다. 파키스탄의 정보부의 경우, 흔히들 딥 스테이트(Deep State)라 불린다. 체제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우선 ‘도저히 합의가 불가능한’ 정책을 방해하고 나섰다. 실제로 PPP와 PML-N의 일부 지도자들은 군부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다. 인도에 대한 협력정책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과거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8년 11월에 16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뭄바이 테러 사건을 조사하면서 인도와 협력하려 했다.

그러나 나중에 인도 언론 및 외신에 의해 밝혀진 내막에 따르면, 결국 이 테러 사건은 파키스탄 군부가 기획한 테러였다. 자르다리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를 포기해야 했다.

◆ 나와즈 샤리프의 독자행보

자르다리 대통령의 뒤를 이은 나와즈 샤리프는 PML-N 소속으로 이미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그리고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색깔은 확실했다. 그는 과거 군부와는 우호 관계를 구축해 정권을 획득한 바 있지만, 1999년에 있었던 군사 쿠데타 이후로는 군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대표적인 정책이 ‘친인도’ 제스처였다. 샤리프 총리는 인도와의 군비 경쟁은 소모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인도와의 교역을 늘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두 번째 임기에는 인도와 평화정책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로서도 바라던 바였다.

이는 군부 수뇌부를 자극했고,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가 1999년 파키스탄 헌정 역사상 세 번째의 군사 쿠데타였다. 이유야 어떻든, 파키스탄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이자, 군부의 본거지인 펀자브 지역을 정치적 근간으로 삼고 있는 샤리프로서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는 분석도 있다. 

군부에게 인도와의 평화 정책은 자신들의 존립 이유를 뒤흔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애초에 군부가 1950년대 중반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이유 역시 안보 불안과 ‘악마화’된 인도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다. 인도가 성장할수록 이들의 불안감도 가중되었고, 군부는 이를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재확인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뿐만이 아니다. 과거 파키스탄은 무슬림 국가 중에서 미국과 가장 사이가 가까운 나라이기도 했다. 미국 역시 냉전 시절 중국과, 자신에게 꼬장꼬장한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파키스탄은 매우 필요한 국가였고, 군부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의 든든한 지원은 파키스탄 국민들이 군부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미국과 인도가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차츰 파키스탄 군부는 그들의 무게 중심을 미국에서 중국으로 옮겨갔다. 인도와 얽혀있다면, 파키스탄 군부는 상대가 누구든 가차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샤리프 총리에 대해 단 하나 긍정적으로 평할 부분이 있다면 그의 ‘친(親)인도’를 향한 의지일 것이다. 그것은 역시 평화로의 의지를 드러낸 시도이기 때문이다.

모디 인도총리를 만나는 나와즈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 (사진=YTN 뉴스 캡처)

2013년 마침내 총리로 재취임한 샤리프 총리는 2014년과 2015년에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거듭 만나며, 인도와의 평화정책을 재추진했다. 자연히 군부는 샤리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차츰 군부는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샤리프를 축출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이따금씩 보도되기도 했다.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 소속 교수이자 파키스탄 정치의 연구 권위자인 아킬 샤는 “샤리프 시절 군부는 노골적으로 정부와 대립했다”며, “2010년대 중반부터 파키스탄 정치권력은 세 개의 축으로 고착화되었다. 대통령, 총리,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이 그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의 입장에서는 인도와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카슈미르 지역의 분할을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군부의 막대한 예산이 사라질 것이었다. 따라서 군부는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보이며, 이에 대한 방해공작도 서슴지 않았다. 

샤리프 총리는 자신의 정책을 고수했고, 군부는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군부에 그를 제거할 기회가 전혀 예기치 않게 주어졌다. 샤리프 총리가 파나마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불법 비자금을 세탁하려던 혐의가 포착되었던 것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조세회피 고객 명단이 포함된 ‘파나마 페이퍼스’를 공개하면서 샤리프 총리의 부패 혐의가 구체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샤리프 전 총리 일가는 영국 런던 등에 신고하지 않은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부패 혐의에는 그의 온 가족이 연루되어 있었다.

군부의 사주를 받은 사법부는 이 문서를 놓치지 않았다. 사법부는 대법원의 요청에 따라 구성된 조사위원회에 군부 인사를 참여시켰다. 대법원은 샤리프 총리가 정치인으로서 ‘성실함’과 ‘미덕’을 요구하는 헌법을 위반했다고 선언했다. 공공연히 샤리프의 후계자로 언급되던 그의 딸 역시 해당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의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샤리프 총리는 2017년 7월 28일 부정부패 혐의로 해임됐으며, 자격박탈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군부는 샤리프 총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 임란 칸의 동장

그리고 누가 샤리프 총리를 대체했을까? 군부 입장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권력을 직접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10년 전부터 이를 피해왔다. 

먼저, 군사쿠데타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에서 파키스탄 군부가 치르게 될 부담이 컸다. 또한 파키스탄이 국제통화기금(IMF) 등 외부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도 군부가 전면등장을 자제한 이유이기도 했다. 

군부는 무샤라프(1999~2008)의 전례에서 교훈을 얻었다. 2000년대 초반 카슈미르를 향해 가해진 테러와 국지전으로부터 드러난 결과 역시 그들 자신을 제외한 국제사회 모두가 그들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예로 군부는 더 이상 인도를 자극하는 모든 테러와 도발로부터 무관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 (사진=SBS뉴스 캡처)

따라서 군부는 손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군부를 대신할 인물을 내세워 인도·아프가니스탄·미국·중국 등 불편한 이슈들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중립을 지키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다. 가령, 최근 파키스탄은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은 군부의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군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군부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투표에서 선출될 만큼 인기가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우선 선거에서 당선될 만큼의 능력은 갖추어야 했으니, 선택지는 그리 넓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정권의 이미지를 유지했다. 국민들에게는 어느덧 민주적인 정권 교체도 익숙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국가 정체성에 관한 논란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군부가 지지하는 인물이 동시에 국민이 지지하는 지도자일 수 있을까?

파키스탄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은 전술했듯이, 인도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강력한 정권에 대한 욕망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그러한 혼미 속에서 임란 칸은 군부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유일한 후보자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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