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여성 골반 조사 결과… 산도 형태 ‘제각각’

아기가 태어나는 산도(産道 · birth canal)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능이 줄다리기를 한다.

신생아의 머리가 좁은 산도를 힘들이지 않고 나오려면 되도록 넓어야 한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걷기에 편하려면 산도는 되도록 좁아야한다. 이를  ‘산부인과의 딜레마’(obstetrical dilemma)라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진화적인 관점에서 산부인과의 딜레마를 감안해 보면, 전 세계 여성의 산도는 공통된 모습으로 표준화의 길을 가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실제 각 지역별로 여성의 골반 안에 자리잡은 산도를 조사해보니, 예상과는 매우 다양한 모습과 사이즈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로햄턴 대학교(University of Roehampton)의 생물인류학자인 리아 베티(Lia Betti)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진화생태학자인 안드레아 마니카(Andrea Manica)는 세계 24개 지역의 여성 골반 뼈 348개를 측정하고 산도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여성들의 산도가 서로 매우 달랐는데 그 원인조차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

 

다소 넓고 타원형인 산도(위)와 좁고 깊으며 원형에 가까운 산도 ⓒ Lia Betti
다소 넓고 타원형인 산도(위)와 좁고 깊으며 원형에 가까운 산도 ⓒ Lia Betti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과 일부 아시아 지역 여성들의 산도는 전체적으로 좁았지만, 입구에서 출구까지가 깊었다. 이에 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좀 더 넓었다. 아시아와 유럽 및 북아프리카 지역 여성들의 산도는 이 중간쯤에 속했다.

추운 지역에 사는 여성의 산도는 산도 입구가 좀 더 타원형이었다. 연구팀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여성들의 산도 입구가 가장 달걀과 비슷한 타원형이었다고 23일 ‘로열소사이어티B회보’(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저널에 발표했다. 이 골반 뼈는 기원전 2000년 전 부터 현대 여성에 이르기까지 약 4000년의 간격을 가진 것들이다.

예상과 달리 ‘표준 골반’ 나타나지 않아

물론 지역별로 신체의 여러 부분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산도의 차이는 다른 신체 부위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산도가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University of Victoria)의 인류학자인 헬렌 쿠르키(Helen Kurki)는 “여성의 산도가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졌다는 것은 ‘여성의 산도가 어떤 최상의 형태를 가졌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것이어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성이 어떤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저 환경과 무관하게 이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산도의 형태가 의외로 다양할뿐더러, 그 다양성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인류학자들이 더욱 큰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의학적으로 볼 때도 이번 연구결과는 충격적이다.

의사들은 산도가 다양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채 주로 서양여성의 산도의 크기에 맞춰 각종 처방을 써 왔다. 특히 산부인과 훈련과정이 유럽 여성들의 골반 모형에 바탕을 두고 이뤄졌기 때문에 수많은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수 십년 동안 내려오는 가설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많은 잘못된 지식을 전파했다. 예를 들어 신생아가 산도를 통과할 때 신생아를 회전시켜야 한다는 등의 가정이다.

문제는 산도의 모양에 따라 출산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여성들에게는 이상한 출산방법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사실은 다른 지역의 여성들에게는 전혀 문제없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잘못된 산부인과 상식으로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겸자분만(forceps delivery)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아주 커다란 집게 같이 생긴 도구로 신생아의 머리를 잡고 꺼내는 방법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들은 출산할 때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신생아가 자궁에서 돌아서지 않자, 겸자분만을 통해 출산을 했다.

리아 베티 박사는 겸자분만에 대해 “잘못된 상식에 바탕을 둔 끔찍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현대 여성에게 있어서도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산도가 있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골반의 모습과 전형적인 신생아 출산의 패턴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사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딜레마에 빠진 ‘산부인과 딜레마’ , 유전적 부동 등 여러 추측 난무

과학적으로 본다면 여성의 골반과 산도는 산부인과의 딜레마를 입증하는 광범위한 증거를 제공해야 맞다.

산부인과의 딜레마는 인간만이 가진 매우 독특한 특징이다. 인간만이 신생아를 낳을 때 합병증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유인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혼자서 새끼를 낳는다.

이런 산부인과의 딜레마는 인간의 직립보행과 깊은 연관이 있다. 원인류인 호미닌이 네발로 걷다가 두발로 걷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산도의 크기는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를 출산하려면 머리가 커야 때문에 골반이 더 넓어야 한다는 산부인과의 딜레마가 인간에게만 나타났다.

그런데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여성들의 골반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자연선택이 아니라, 임의의 무작위한 진화의 증거라고 보여진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 결과에 큰 흥미를 갖게 됐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은 산도의 다양성이 혹시 유전적 부동(浮動 · genetic drift)에 의해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에서 나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산도에 대한 원래의 유전적 다양성의 일부만 가지고 옮겼을지 모른다는 추정이다.

 

지역별로 산도의 모양이 다양하면서 분만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 Pixabay
지역별로 산도의 모양이 다양하면서 분만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 Pixabay

그러나 유전적 부동도 정확한 원인이 아닐 수 있다.

최근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면 네안데르탈인과 아직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데니소바인(Denisovans)들이 현대 인류와 혼합됐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원인류들과의 ‘로맨틱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많은 학자들은 후속 연구를 통해 출산에 대한 보다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은 위험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분만 중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여성은 매년 30만 명에 이른다.

<이 기사는 사이언스타임즈(www.sciencetimes.co.kr)에도 실렸습니다. 데일리비즈온은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송고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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