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고 연설하는 오프라 윈프리 ⓒ 오프라 윈프리 페이스북

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블랙의 향연이었다. 레드카펫에 오른 당대의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메릴 스트립, 수전 서랜던, 앤젤리나 졸리, 앤 해서웨이, 엠마 스톤 등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블랙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타임스업(Time’s up) 배지가 빛났다. 

타임스업은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와 작가 등 300여 명이 올해부터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해소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한 캠페인이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 폭로를 시작으로 불붙은 미투(Me Too) 운동의 제2탄 격이다. 블랙은 침묵 속에 고통받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항의와 연대감을 표시하는 상징이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흑인 여성 최초로 평생공로상인 세실 B. 데밀 상을 수상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64)의 연설이었다.
“오랫동안 여성은 남성들의 권력에 맞서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들어주는 곳도, 믿어주는 곳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Time is up). 새로운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날은 훌륭한 여성들 때문에 올 것이고 그들 중 많은 분들이 오늘 밤 이곳에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기립박수를 받은 감동적인 연설 직후 그녀는 단박에 차기 미국 대통령 민주당 후보로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그녀가 트럼프 대통령을 이길 것으로 조사됐다. 사생아로 태어나 미혼모가 됐고, 어리고 가난한 흑인 여성에게 가해진 성폭행과 차별을 이겨내고 미국 최고의 방송인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윈프리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중 한 명이다.  

▲ 카트린느 드뇌브. ⓒ 카트린느 드뇌브 페이스북

그 이틀 후,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의 대표적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75)가 역시 미투 운동과 관련해 전 세계의 뉴스를 탔다. 그녀가 프랑스 문화·예술계 여성 100명의 이름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지인 르몽드에 기고한 글 때문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성적 자유에 필수불가결한 유혹의 자유를 변호한다” 미투 캠페인을 비난한 건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비판한 첫 문제적 셀렙이 됐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투 캠페인은 남성들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그들을 성범죄자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여성을 주체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악마 같은 남성들의 지배 아래 여성들을 영원한 희생자로 두고 선의 이름으로 여성보호와 여성해방을 언급하는 것은 청교도주의적 발상이며 사회에 전체주의의 기운을 심어줄 뿐이다. 우리는 성폭력과 적절하지 않은 유혹을 구분할 만큼 현명하다. 성폭력은 분명 범죄다. 그러나 여성의 환심을 사려거나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남성과 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혹의 자유는 필수적이다.”

미투 캠페인이 남성에 대한 ‘마녀사냥’이라는 논리다. 이 주장은 즉시 세계적 논란을 불렀다. 뉴욕타임스의 한 카툰 작가는 “만약 드뇌브가 그렇게 미모가 뛰어나지 않거나 혜택의 거품 속에 사는 부유한 여성이 아니라면, 지하철을 한번이라도 타봤다면, 성희롱에 대해 다른 의견을 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물론 프랑스 여성단체도 비판 성명을 발표했지만 반향은 미국과 영국에서 더 컸다. 

드뇌브는 자신의 발언이 세계적 논란으로 커지자 14일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서신을 보내 “르몽드에 발표한 입장을 통해 불쾌감을 느꼈을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 성희롱을 옹호할 의도가 있었다면 내가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프랑스 여성주의의 아이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주창한 낙태권에 서명한 페미니스트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지만 모두가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흐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단순한 비난이 처벌과 사임, 미디어 린치로 이어지는 시대다.”

흥미로운 건 발언의 진원지인 프랑스 내에서는 막상 그 파문이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인 미투 캠페인의 물결은 프랑스 여성계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 강도는 낮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과거의 성희롱으로 고발당해 사임한 권력형 남자는 프랑스에서 발견할 수 없다. 

왜 그럴까. 프랑스인들도 성폭력을 옹호하는 건 분명 아니지만, 유별나게 사랑과 유혹에는 왜 그리 관대할까. 최고의 신문인 르몽드는 드뇌브의 주장을 왜 당당히 실어주었을까. 

이런 사례가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신문사의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다. 1994년 11월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가 커버스토리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 처녀와 레스토랑을 나서는 사진을 게재했다. 제목은 ‘특종: 대통령의 숨겨진 딸’. 깜짝 놀랐다. 동양에서 온 기자를 한 번 더 놀라게 한 건 이를 접한 프랑스인의 정서였다. 하루 뒤, 르몽드 1면에 이런 사설이 실렸다. 그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Et, alors?” 영어로 옮기면 “So what?”이다. 우리말로 하면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다. 대통령을 비난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사생활을 폭로한 파리마치를 준엄하게 꾸짖은 논조다. 

대통령의 숨겨진 여인은 안 팽조라는 박물관 큐레이터였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팽조는 19세의 여고생이었다. 고향친구의 딸로 무려 27세나 연하였다. 두 아들을 둔 46세의 미테랑은 사회당의 대선 후보였다. 둘은 미테랑이 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음해 세상을 뜰 때까지 34년간 혼외관계를 유지하며 딸을 낳아 키웠다.

사실 프랑스 대통령들의 러브스토리는 유난스럽게 대를 잇고 있다. 천하가 다 인정한 바람둥이거나(시라크), 재임 중에 이혼하고 재혼해 아이를 낳거나(사르코지), 심야에 스쿠터를 몰고 엘리제궁을 나가 밀회를 즐기고 공식적으로 동거녀를 여러 번 바꾸었다(올랑드). 그렇지만 프랑스에서는 정치인의 사생활이 거의 정치적 사회적 논란이나 공격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인은 자신들처럼 대통령도 연애할 권리가,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24세 연상의 고등학교 은사를 퍼스트레이디로 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소설 같은 러브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사회통념과 일반상식을 뛰어넘은 요란하고 논쟁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유독 프랑스에 많다.  나는 그걸 ‘프랑스적’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스토리는 실제든 문학작품 속에든 뿌리가 깊다. 사랑의 환희와 고통, 관능과 욕정, 몸의 해방과 정신의 자유는 위대한 프랑스 창작예술의 영감이 됐고, 프랑스적 사랑의 토양이 됐다. 

19세기 여성해방의 선각자로 당대의 시인 뮈세와 쇼팽 등 많은 예술가와 평생 자유분방한 연애를 한 작가 조르주 상드. 프랑스 현대문학에 우뚝 선 고독과 은둔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당신의 문학과 지성을 흠모하고 당신의 육체까지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38세 연하의 청년문학도 얀 안드레아의 편지 유혹을 받아들여 81세로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함께 살았다. 로댕과 제자 카미유 클로델의 비극적 사랑, 시인 베를렌느와 랭보의 동성애적 집착과 질투,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동지애 적이며 실존적인 계약동거…. 문학 속으로 들어가 보면 더 무수하다.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쾌락적 사랑에 빠졌다 파국을 맞는 엠마(플로베르 소설 ‘마담 보바리’), 평생 자유와 진정한 사랑을 갈구한 잔느(모파상 소설 ‘여자의 일생’)…. 

▲ 2017년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입장하는 카트린느 드뇌브. ⓒ 카트린느 드뇌브 페이스북

그런 점에서 나는 카트린느 드되브의 발언을 프랑스적 정서로 이해하고 싶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에 자유로운 국민, 사랑에 치열한 사람들이다. 대통령이든 예술가든 갑남을녀든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도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내로남불’은 없다. 남녀상열지사에 대해서는 ‘톨레랑스’만 있다. 그런 그들에게 유혹은 사랑에 불을 댕기는 촉매다.
 
‘사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로 옭아맬 수 없는 게 프랑스식 사랑이다. 그들은 사랑을 ‘발명’했다. 관습이나 평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에 유별난 건 사랑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인류다. 내 청춘의 로망이었던 카트린느 드뇌브는 그 후예다.

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hkb821072@naver.com)
전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전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전 한국온라인신문협회장, 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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