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을 죽었다가 살아 난 불굴의 정신
토요일마다 대전역에서 무료 떡 나눔 
뇌신경손상 돼 양손 목발 짚은 장애인 봉사대장
3년째 (사)한나본과 함께 자원봉사

두 다리가 불편한 김영덕(62)은 목발을 짚고 뒤뚱뒤뚱 힘들게 걷는다. 김영덕은 40년 가까이 그렇게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매주 3일을 대전시 서구 정림동에 있는 떡 공장으로 가서 기부하는 떡을 받아 온다. 대전역에서 그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 위해서이다. 

(사)한글사랑나라사랑국민운동본부(한나본) 대전역 봉사대장인 김영덕은 한나본 회원 10여명과 함께 토요일 오후 3시만 되면 대전역으로 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더워도 빠지지 않고 120여 명에게 사랑의 떡을 무료로 나눠준다.

두 목발 짚은 떡 봉사 대장 김영덕
김영덕 봉사대장.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들었지만, 김영덕은 3월 14일에도, 3월 7일에도, 2월 29일에도 중단하지 않았다. 

김영덕은 “제가 가져온 떡을 받은 분들이 ‘밥도 못 먹어 배고팠는데 떡을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그에게 가장 힘든 일은 떡 공장에서 떡을 자루에 싣은 뒤 수십 미터 떨어진 승용차로 들고 와서 싣는 일이다. 걷기도 힘든데 떡 자루를 들고 온 힘을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며 옮기는 일을 무려 1년 동안 일주일에 세 번씩 하고 있다. 한 자루에 떡을 30개만 넣는 것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옮길 수 있는 무게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그는 외친다.

‘떡 받으러 오세요. 아무나 드립니다. 무료로 드립니다.’

이런 모습이 안타까워서 가끔 대신 받아다 주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지만, 몇 번 하다가 힘들어서 그만둔다. 아직까지는 꾸준히 도와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노숙 못지 않은 어려운 일을 지나온 김영덕은 “나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한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 한 번 하면 책임감있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하는 좋은 습관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 한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영덕은 “그런 일을 해 보니까 좋더라”고 말했다. 

김영덕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일주일에 3번씩 기부한 떡을 받아온다.
김영덕 대장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일주일에 3번씩 기부한 떡을 받아온다.

벌써 1년 가까이 됐다. 김영덕이 떡을 받아다가 대전역에서 나눠 주기 시작한 세월이. 한 손으로 무거운 떡 봉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목발에 의지하면서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김영덕은 “세 번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한다. 19세 때 삼성전자에 실습 나갔을 때 김영덕은 자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출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하숙집 주인이 발견해서 수원 성빈센트 병원으로 옮겼다. 김영덕은 3일 반나절을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것으로 부족했을까, 김영덕은 24세 때 대우건설 파견 시험사로 리비아에 나가 있었다. 그가 맡은 일은 콘크리트 타설이 규정대로 됐는지 검사하는 일이였다. 일본인 기술자와 함께 차를 타고 공사장으로 가다가 트럭과 정면충돌했다. 그가 탄 승용차는 12미터를 날아가 떨어졌다. 역시 3일 반나절 동안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1년 동안 백병원에서 입원 치료했다. 

그 뒤로 김영덕은 허리를 관장하는 뇌신경이 고장 나서 두 다리가 온전하지 않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천만다행으로 자동차 페달을 밟는 것은 가능했다.

세월이 한 참 흘렀다. 인생의 고뇌와 방황에 빠진 김영덕에게 35세가 되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뜻 모를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도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할세.”

이 한 마디에 낚인 김영덕은 바로 산으로 올라갔다. 논산 부근에서 작은 집까지 짓고 수양하기를 무려 17년, 어느 날 갑자기 양쪽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중동 공사장에서 다친 부위가 도진 것 같았다. 충남대 병원에 입원해서 진단을 받아보니, 회전근계 근육이 마치 바다 해초처럼 풀려 있었다.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수술도 어려운 극한 상황이 다시 찾아왔다.

세 번째 죽음의 고비에서마음을 고쳐먹자, 수술도 하지 않고 팔이 좋아졌다. 그 뒤로 김영덕은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 나선다. 17년간 지키던 집을 자기 손으로 완전히 부숴버리고 52세때 새 출발을 결심했다. 

어깨 통증은 사라졌지만, 불편한 다리는 여전하다. 그런 김영덕에게 든든한 동역자들이 모였다. 6년전부터 한글사랑과 나라사랑을 기치로 내걸고 토요일 거리 캠페인을 해 온 (사)한나본이다. 한나본 회원들과 김영덕은 3년 전부터 손발을 맞춰가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애국가 식탁보 그리기, 사랑의 카드 나누기 같은 무료 체험 행사를 벌여왔다.

김영덕은 2019년에는 아예 없는 돈을 모아서 1.2톤 짜리 윙바디 트럭을 한 대 구입하고 그 안에 음향장비를 설치했다. 간단한 이동식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대전역에 음향장비를 갖춘 윙바디 트럭이 서 있다.
대전역에서 윙바디 트럭을 세워놓고 1년째 떡 나눔 행사를 하는 김영덕 대장과 (사)한나본 자원봉사자들.

처음에는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은행동 으능정이로 윙바디 트럭을 끌고 나가서 체험행사를 벌이고 노래도 했다. 

그러던 중 김영덕의 관심은 대전역으로 옮겨갔다. 음향장비로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을 위로하기에는 광장이 제격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한 번 시작하면 온 정성을 다해 철석같이 일정을 지키는 것이 몸에 밴 그다. 토요일에 다른 지방에서 약속이 잡혀도 오전만 마치고 달려올 만큼 책임감으로 토요일 대전역을 사수했다. 

처음에는 30여명 모이던 광장 모임은 빠지지 않는 성실한 김영덕을 보고 조금씩 늘어나 요즘은 120여명으로 늘었다. 노인들을 위해 간이 의자도 마련해서 깔아놓았다.

어느 곳이나 역전 광장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다.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도 많지만, 딱히 갈 곳을 잃은 사람들도 오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역이다. 자신처럼 인생의 방향을 잃고 갈 곳을 모르는데 생활의 어려움마저 겪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은 풀어주고 싶었다. 윙바디 차량을 세우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러줬다. 

이런 착한 마음을 알게 된 지인이 어디선가 떡 50개를 얻어다가 김영덕에게 주는 것이었다. 김영덕은 그 떡을 고맙게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자 50개는 100개로 늘었다. 더욱 감사하자, 이번에는 아예 판매되지 않은 떡을 무료로 기부하는 떡 공장으로 연결됐다.

대전역에 모인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 김춘희
대전역에 모인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

대전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 생긴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떡 공장에 가서도 항상 감사를 표시하는 김영덕에게 공장 주인은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결국 김영덕은 일주일이면 3일을 떡 공장에서 떡을 받아온다. 여전히 두 목발을 짚고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어떤 날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두 번씩 방문한다. 그가 받아오는 떡은 한번에 400개에서 500개 정도이다. 김영덕은 “그 분들에게 소중하게 떡을 전해 줄 때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힘들지만 즐거운 일을 하는 김영덕에게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외된 가슴을 안아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식당과 작은 목욕시설을 설치해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고 싶다. 그들에게 떡만 아니라, 마음도 보듬어 주고, 생활수단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거나, 자격증을 따게 해서 사회에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고 싶다. 

자원봉사자들은 떡을 나눠주면서 노래도 들려준다.
자원봉사자들은 떡을 나눠주면서 노래도 들려준다.

김영덕은 “역 주변에서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은 많지만, 기술을 가르쳐서 사회로 돌려보내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면서 “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영덕은 “나도 몸은 불편하지만, 정신은 건강하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려운 구덩이에 빠졌을 때, 누구든지 혼자의 힘만으로는 나오기 어렵다. 이럴때는 제3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김영덕도 적지 않은 나이이다. 과연 어느때까지 일주일에 3번씩 수백 개의 떡을 나를 수 있을까?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까지 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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