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성장통 심하게 겪어
청소년수련원 세우고 원칙대로 운영
설립 6년만에 충북 최우수수련원 수상
스리랑카 어린이 후원사업도 시작

[데일리비즈온 심재율 기자]  임묘진 장미청소년 이사장은 원래 스타일링을 전공하고 수원대학교에서 뷰티학과 교수로 강의했다. 그런데 너무 일에 집중하다 보니 30살에 자궁암에 걸려서, 3년 정도 고생하다가 결국 일을 그만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사업마저 부도나는 바람에 고향 경기도를 떠나 대전으로 옮겼다. 

일을 쉬면서 명상하는 시간에 마음을 가다듬고 너무나 힘든 사춘기를 겪었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됐다. 그녀가 초중고생이었을 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 한마디라도 정확하게 제대로 해줬으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에게 점 하나라도 찍어줄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임묘진 장미청소년 이사장.

그런 바람이 지금의 임묘진 이사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송호청소년수련원이다. 그런데 안면도에서 수련회 도중 고등학생 5명이 죽고, 리조트에서 대학생이 사망하고, 결정적으로는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청소년 수련활동을 제대로 운영할 준비가 부족한 탓이었다.

수련원 문을 닫아야 할 위기상황에서 직원들이 ‘나중에 잘 되면 주세요’하고 두 달 급여를 반납해서 버틸 수 있었다. 2015년 메르스가 퍼지면서 수련원 활동이 다시 한번 치명타를 입었을 때는 대출받아 월급을 지급했다. 다행히 그 다음해부터 수련원 운영이 정상화됐다.

정상화 비결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경험이 없다 보니 매뉴얼대로 원리원칙을 따라서 운영하는 것이다. 임 이사장은 “나는 모르기 때문에 책에 나온 대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부실 수련원은 사실은 비용절감을 위해 원칙을 어겨서 생긴 것이 많았다. 

현재 직원은 17명. 대부분의 수련원은 비용절감과 영리확대를 위해 하청을 주지만, 임 이사장은 직원들을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책임감과 소속감을 높여줬다.

성수기 한 때만 일하는 수련원 특성을 잘 아는 동종업계에서는 곧 문 닫을 것이다, 미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교육이니까, 자신이 겪었던 청소년의 성장통을 도와주려고 시작한 수련원 사업인데 하청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월호 사건 이후 모든 수련원 직원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2012년에 설립한 수련원은 6년 만인 2018년 충북 최우수 기관상을 받았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청소년 시절 집안 분위기가 우울했다. 동생이 정신박약 중증 발달장애를 겪는 바람에 좋은 분위기가 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바람 쐬러 동생을 데리고 나오면, 아이들이 돌을 던졌다. 동생에게 돌 던지는 아이들을 보고는 임 이사장은 장돌을 들고 가서 팼다. 

1970년대 초반, 동생이 경기가 나서 병원에 갔는데 얼음물에 아이를 담구는 바람에 열이 머리로 오르면서 뇌신경의 일부가 녹아 끊어졌다. 일종의 의료사고였지만, 1970년대 동네의원에서 발생한 사고는 집안에 커다란 상처만 남기고 그렇게 넘어갔다. 금방 사망할 것 같았던 동생은 할머니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나 임 이사장이 대학교 1학년 때 17세로 사망했다.

의료사고로 장애를 입은 동생을 둔 집안에서 임 이사장은 덩달아 바깥출입을 못했다. 친구도 없이 책을 끼고 살았다. 아빠는 그녀를 서점으로 불러내 읽고 싶은 책 사주고 붕어빵에 군고구마 사 먹으면서 숨통을 틔워줬다.

아빠는 8살 때 부터 말했다. “아빠가 먼저 죽으면 막내 영미를 네가 맡아야 하는데, 시댁눈치 보지 않게 영미이름으로 재단법인 세워줄테니 네가 돌봐줘라-.”  

영미재단은 설립되지 않았지만, 임 이사장은 지금 수련원이사장을 맡아 이 땅의 수많은 영미를 돌본다. 

임묘진 장미청소년 이사장.

통이 큰 어머니는 건설업으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사업이 모든 일의 우선이었다.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다 물리쳤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청소년 시절 그녀는 가출충동에 시달리고 자살기도도 많이 했지만, 다행스럽게 넘어갔다. 대학생 때 부녀는 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고1때 엄마가 모는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딸은 머리 50바늘을 꿰매는 큰 사고를 당했다. 머리가 깨져 뇌가 보일 정도의 큰 사고였다. 의식을 잃고 한 달을 입원했으며 허리나 무릎이 멀쩡한 곳이 없었다. 30세 때 자궁암 앓고,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는 스트레스에 디스크도 파열하면서 왼쪽 다리도 절었다. 

이런 모든 고난이 쌓여 지금 그녀는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내가 겪은 모든 사건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준비인 것 같다”는 임 이사장의 고백은 인간이 성장하는데 얼마나 뜨거운 담금질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듯 하다.

청소년을 돕기 위해 임 이사장은 주식회사 송호청소년수련원에서 수입이 생기면, (사)장미청소년을 통해서 청소년에게 장학금도 주면서 사회에 환원한다.

수련원 프로그램 중에는 ‘나너우리’가 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치게 하는 인성개발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지루하지 않게 매년 내용을 바꿔준다. 공황장애나 정서불안 등 위험이 있는 청소년은 교사들이 집중적으로 돌봐준다.

가출충동, 자살충동, 불안한 고립감, 소외감 등 임 이사장이 청소년 시절에 시달렸던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의 마음을 드러나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프로그램이다. 

수련원 입소식 때 처진 어깨로 고개 숙이고 스마트 폰에 눈을 고정했던 아이들이 수련원을 나갈 땐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고, 교사들과 웃고 떠들면서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보면 임 이사장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표현한다. 대전과 충북지역에서 많이 오는 연수생 숫자는 매년 2만명 정도이다. 

임 이사장은 범위를 넓혀 스리랑카 어린이도 후원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만난 스리랑카 친구를 따라 2년 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4시간 떨어진 마을을 방문하게 됐다.

축구공과 크레파스 300개를 사가지고 갔는데,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막 났다. 그 중 딸 4명을 홀로 키우는 엄마의 집을 방문했다. 호롱불을 켜고 하루에 죽 한번 끓여 먹다 보니 동네에서 조금씩 도와주는 집이었다. 

임묘진 이사장은 스리랑카 어린이 후원도 시작했다.
임묘진 이사장은 스리랑카 어린이 후원도 시작했다.

초등학교 1, 2학년생 같이 보이는 둘째 딸의 눈은 허공을 보는 것 같이 에너지가 없어 보였다. 그 너머에 사막 같은 공허함이 있어서 가슴이 무너져내려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전, 통역을 통해서 물어봤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공부하고 싶어요.”

임 이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안아줬다. 아이는 엄마하고 맨발로 쫓아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그때 처음으로 임 이사장과 눈을 맞췄다.

두 달 있다가 스리랑카에서 ‘한국 이모 바꿔주세요’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펑펑 울던 임 이사장은 스리랑카 학생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올해 다시 방문해서 초등학교에 여학생을 위한 전용 양호실도 만들고 여성 용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장미청소년이란 이름은 ‘장차 미래를 만들어 갈 청소년을 위한 단체’라는 뜻이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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