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산악계에 남은 과제는 첫째, 8천미터 14 자이언트의 완등이다.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에베레스트가 초등정되었다. 등산가들은 이제 최고봉이라는 높이의 문제에서 해방되었고 등산사의 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최초라는 단어의 마력은 많은 갈등과 모순점을 단숨에 덮어 씌우기도 하고 중독성이 강한 유혹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만큼 등산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비를 간직한 산도 없었다.

이제 등산가들은 미래의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베레스트 초등정은 히말라야 역사의 진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세계의 산악계에 남은 과제는 첫째, 8천미터 14 자이언트의 완등이다. 지금까지 5개(이 책이 출간된 당시에는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낭가파르바트, K2, 초오유 초등정)가 초등되었다. 제5위의 고봉인 마칼루는 규모가 크고 가파르며 아직 구체적인 루트의 가능성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나푸르나만이 한 번의 시도에 정찰과 등정이 이루어진 유일한 경우이다.

이 지역의 북동쪽에는 자이언트 중에서 가장 낮고 정보가 취약한 고사인탄(Gosainthanㆍ시샤팡마ㆍ8,013mㆍ산스크리트어로 신의 거처)이 있다. 그동안 이 자이언트에는 어떠한 접근이나 등반시도가 없었다. 네팔보다는 티베트쪽에 가까워 아마 ‘철의 장막’(중국) 지역에서 온 원정대가 도전할 것 같다.

두 번째는 에베레스트를 재등정 할 것인가의 문제다. 초등의 환호성이 채 가시기 전에 재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루트는 노스콜이나 그동안 시도가 되지 않은 다른 루트, 또는 무산소로 이루어질 것이다. 무산소 등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인간은 이미 8,500미터 지점까지 무산소로 도달한 적이 있고 결국에는 그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히말라야에서의 높이(고도)는 통계학자에게 필요한 수치일 뿐이지 그것이 도전의 가치와 비중을 가늠해주는 수치는 결코 아니다. 카라코람의 무스타그 타워(7,284m)는 한동안 등산가들에게 이 시대의 마지막 숙제라고 회자되었었다. 고도는 자이언트보다 낮았지만 가공할 만한 수직벽과 위용에 누구도 섣불리 나서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백 년 전에 마터호른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등정되었다. 등산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 세대에서 불가능하게 보였던 도전의 대상이 다음 세대에서 해결되곤 했다.

세 번째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산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중국 서부의 오지에 암네마첸이라는 산에 대한 보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많은 조종사들이 중국과 인도를 날아다닐 때 9천미터 상공에서도 이 산을 위로 쳐다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목측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고 신뢰도가 떨어지며, 현재의 우리 과학기술 수준으로 만든 고도계도 오류가 많을 것이다.

비행기로 세계일주를 한 바 있는 미국 시카고의 밀턴 레이놀즈는 1948년에 공중탐사대를 조직하여 이 계획을 진행시켰지만 정치적인 난제들로 인해 무산되었다. 나중에 중국의 공중탐사대에 의해 어느 정도 의혹은 풀렸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많이 내포되었다. 그 지역이 방대하기는 해도 주목할 만한 고도의 산은 없었다는 취지의 보고였다. 그 후 이 산과 중앙아시아는 ‘철의 장막’에 갇히게 되고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새로운 최고봉에 대한 연구는 줄곧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네 번째 과제는 예티의 존재 여부다. 아시아의 오지에는 고봉과 빙하와 더불어 다양한 미스터리가 풍부하다. 그중에 예티가 있다. 히말라야의 풍속과 역사에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유인원으로 확인되는 이 생물체는, 첩첩산중에서 괴이하게 짖어대고 동물이나 식물 등의 식량거리가 없는 고산의 빙하나 설원에 나타나며, 원주민과 셰르파들에 의해 목격되기도 해서 그 존재가 인정되고 있다.

서방의 탐험가들은 이 사실을 동화책에 나오는 옛날이야기나 미신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1951년 에릭 십튼이 에베레스트 정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동물의 발자국 사진을 공개했다.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 한 장의 사진에 몰입되었다. 동물학자들은 신체 이상인 곰이라 하기도 하고 변종 원숭이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다. 발자국 사진만 있을 뿐이다. 에베레스트 초등정 이후 예티에 대한 탐사와 발견은 히말라야 탐험사에서 가장 비중있는 이벤트가 될 것이다.

에베레스트가 초등정되었지만 히말라야는 아직도 보석처럼 빛을 발하며 모험적인 등산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도 서서히 자국의 고산과 거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등반장비의 기술개발이 급진전되었고 항공산업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원정대가 히말라야에 진출할 것이고, 히말라야는 백 년 전에 알프스가 그러했듯이 세계 등산역사의 중심이 될 것이다.

히말라야의 미래에서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활동이 가장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들과 우리의 경계선상에 모든 산이 접해있다.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접근로가 있듯이 그들에게도 반대편에 루트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각기 다른 루트에서 출발한 두 진영의 등산가들이 정상 리지에서 조우해 함께 등정 사진을 촬영할 순간이, 멜로드라마 같은 상상이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실현될 것이다.

한동안 초등한 봉우리의 정상에서 등반가 자신의 국기를 세우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국기와 등정자를 자부심과 희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쟁 중에 독일 국기가 정상에서 휘날리는 장면은 등산가들의 순수한 영혼을 괴롭혔다. 등산은 험난한 역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르는 위대한 정신적 행위이지 대륙이나 대양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등정자에게 정상 부근의 영토를 수여하거나 금메달, 석유, 우라늄을 주는 것은 아니다. 등산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순수성이 보장받는다. 국가에서 등정자에게 신분 상승과 지위, 명예를 제공한다면 등산의 가치는 형편 없은 노동의 가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또한 등산의 세계에서 국수주의나 국가 간의 경계, 충성도는 배제되어야 한다. 에베레스트의 영웅인 텐징 노르가이는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대답하기 무척 곤란한 질문이다. 힐러리가 먼저 올랐다고 하면 인도인과 네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실망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유럽인들이 서운해 할 것이다. 당신 기자들이 배려해 줄 수 있다면 두 사람이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고 말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기사를 통일해 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내가 인도인인지 네팔인인지 묻는다.

나의 누님과 어머니는 네팔에 살고 나와 처, 아이들은 인도에서 산다. 나에게 인도와 네팔은 똑같다. 힐러리, 인도사람, 네팔사람, 유럽사람, 그리고 나도 모두 같아야 한다.”

노르가이의 이 대답은 대단히 고귀한 발상이다. 그 어떤 작가나 웅변가보다도 뛰어난 표현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의 이 시대에서 그것은 안타깝게도 이상에 그치고 만다. 히말라야에서의 등반은 챔피언을 선발하는 스포츠가 아니고 대원 모두가 팀워크로 뭉쳐 이루어지는 행위다. 대원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등정에 성공해서 정상에 선 한 사람보다 정찰이나 수송, 캠프설치 등에 애를 쓴 대원들의 기여도가 더 높을 수도 있다.

앞으로 국제적인 여건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예상이 어렵지만, 우리는 국가 간의 정치와 음모, 투쟁 속에 살고 있으며 그러한 갈등들은 멀리 떨어진 산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등산가들이라고 그런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이 세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등산가들이 목표나 동기가 정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돈이나 권력, 정상에서의 국기 게양, 등정만을 위한 등산 등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산과 오름짓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가 초등정되었다. 북극과 남극에도 도달했고 5대양과 정글도 탐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의 꿈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안나푸르나 초등정자인 모리스 에르족이 얘기한 “내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의 의미는,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게는 역시 또 다른 에베레스트가 있고 더 많은 도전과 승리의 환호성이 기다리고 있다.

히말라야의 거봉들은 결코 하늘을 가리지 않는다.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졌다. 히말라야는 항상 거기에 있고 도전도 거기에 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도전이 아니고, 인류의 고귀한 모험정신에 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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