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수출경제의 3/4 이상 차지…되돌려받는 것은 적어
-러시아의 오늘날 경제실패는 ‘시베리아의 저주’에서 찾아야
[데일리비즈온 최진영 기자]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는 물리적으로 아주 가깝다. 불과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 사람들이 시베리아에 갖고 있는 이미지는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품고 있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워낙 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지화는 이반 4세의 통치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시기였다. 이반 4세에게 있어 월터 롤리(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이자 영국의 탐험가)는 예르마크라고 불리는 공작이었다. 그는 탁월한 탐험가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 감각도 남달랐다. 그는 명문가인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고용되어 시비르 한국(Khanate of Sibir)을 인수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와의 모피 거래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예르마크는 1582년 약 800명의 부하와 함께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거점을 확보했다. 불과 3년 후 그는 시비르 한국의 칸에게 습격을 받고 쫓기다 익사하고 말았지만, 러시아의 팽창은 토착민들을 구축하며 무서운 속도로 계속되었다. 1648년까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는 태평양 연안의 오호츠크 항까지 뻗어 나갔다.
반면 예르마크는 롤리나 프란시스 드레이크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때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은 민중의 영웅으로 작용하는 데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민중 작가과 이야기꾼들이 자유로이 상상의 날개를 펴는 데 적합한 조건인 셈이다. 가령 19세기의 낭만주의 신화에서 그는 동쪽으로 이주한 정착민들이 자리잡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그렇기에 정착민들은 토착민들과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그들과 동화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역사학자인 니콜라이 야드린트세프도 “시베리아는 그 기원에서 국가가 주도하거나, 연대된 민중의 창조적 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독립된 자들의 결실이다”라고 보았다.
시베리아인들은 때로는 모스크바와 연대하고, 때로는 토착민을 착취했다. 예르마크가 발견하고 빼앗을 땅은 과거 2류 국가에 불과했던 공국을 세계 최대의 영토를 지닌 대국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수세기에 걸쳐 시베리아는 러시아, 소련, 그리고 러시아의 경제를 지탱해오고 있다. 17세기의 값진 모피와 소금, 19세기의 귀금속과 금, 그리고 20세기의 석유와 가스의 원천인 시베리아의 광활함은 러시아에게는 서양이 미국을 향해 품었던 이미지와 비슷한 것이었다. 안톤 체호프는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세상에, 이곳이 러시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라며 “나는 러시아가 아닌 텍사스의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썼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잇다. 모스크바는 시베리아를 단지 약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다. 반면 러시아 전체 수출액의 4분의3이 시베리아의 경제에서 기인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자원과 불공정한 거버넌스로 인해 러시아는 수세기 전처럼 경제를 현대화하거나 국가 독점구조를 포기하지 않고도 경제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전업 작가인 클리포드 개디와 피오나 힐은 이를 ‘시베리아의 저주’라고 부른다. 그들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핵 청문회 당시 의회 증언으로 인기를 얻은 스타 작가들이다. 그들은 책에서 “시베리아의 지리, 극한기후, 러시아 통치자들의 (시베리아를 향한) 잘못된 판단이 러시아의 발전을 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본질적으로, 그들은 "경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러시아는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요약한다. 영토가 아니라 경제지형을 축소해야 한다."
시베리아와 모스크바의 관계는 우랄 산맥을 가로지르는 무역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원을 넘기는 대가로 시베리아는 모스크바로부터 범죄자, 매춘부, 반체제 인사, 혁명가를 받았다. 시베리아 망명의 역사를 담은 책 ‘죽은자의 집’의 저자 다니엘 비어는 “시베리아는 제국 자신의 무질서의 수용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이들의 불평등한 관계는 “시베리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망명자들은 모스크바로의 화려한 귀환을 예고했다.나폴레옹전쟁 동안 자유주의를 전파하다 시베리아로 끌려갔던 젊은이들은 곧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유와 민족주의, 공화주의의 이상을 주입시켰다. 그들은 18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1명은 다시금 동쪽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망각 대신 희망을 찾았다. 26세의 데셉브리스트 니콜라이 바사르긴은 일기장에 “시베리아로 더 멀리 여행할수록 더욱 시베리아에 끌렸다”라며 “이 곳의 서민들은 모스크바의 농노들보다 더 자유롭고 활달하고 교육받은 것 같았다. 현지인들은 오히려 미국인과 비슷하다”고 술회했다. 바사르긴은 “시베리아가 미국에 비해 인권과 교육면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그러나 시베리아가 오늘날 세계인들의 관심에서 이토록 멀어진 것도 역시 모스크바와의 불공정한 관게에서 기인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