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비평] ‘벌새’ 속 지독한 자기연민
[시네마비평] ‘벌새’ 속 지독한 자기연민
  • 박종호 기자
  • 승인 2019.09.04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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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J)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아쉬운 영화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다는 경력이 무색했다. 영화는 보편의 정서를 다룬다고 말하나 지나치게 안일했다.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은 우리도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계층이동과 인정욕구에 목말랐던 시점으로 묘사된다. 이 가운데 은마아파트 사는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성장통을 그렸다. 특히 성수대교의 붕괴가 은희에게 상흔을 안겨주는 매개로 기능했다, 보통사람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재를 치열하게 묘사하는 일반 독립영화와는 달리, 특정계층의 정서를 특정시점에서 진행하며 공감을 요구했다. 그러니 상당한 설득력이 요구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1994년 대치동에 사는 은희가 왜 그렇기 힘들었는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치동 금수저의 지독한 자기연민에 대한 영화라는 비평에 시선이 쏠린다. 그 이유로 고질적 병폐인 ‘소수자를 다루는 이기적인 시선’을 은희에 투영시켰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의 모든 남성들은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다. 아무리 동정적으로 보아도 희생하는 엄마, 저항하는 여선생, 그리고 은희를 위해 편리하게 쓰이고 버리는 도구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가장 낡은 페미니즘이론인 동성사회성에 경도된 나머지, 연출자가 이에 대응하는 여성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은희가 손가락 잘린 공장 노동자의 노래로 위로받는다는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은희의 주변인들이 감히 경험할 수 없는 공간에서 투쟁한다. 이 영화는 대치동과 담벼락 하나로 분리되어있는 구룡마을의 삶을 단편적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언제나처럼 열려있던 문이 오늘은 잠겨있더라는 신은 명백히 안일했다.

왠지 익숙한 비판이기도 하다. 탈식민주의는 무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부터 이러한 편리성을 비판해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굳이 1994년일 필요도, 대치동 사는 은희가 주인공일 이유가 없다. 탈식민주의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담론이니 오늘의 시대를 다루고 보편의 기준으로 비판받으면 된다.

김보라 감독은 영화를 자전적이라 말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게 더 놀라울 영화다. 사족으로 은희가 스스로를 대청중학교에 다닌다고 소개하는 장면은 없느니만 못했다. 강남 일대의 고등학교에서는 아직도 매년 3월이면 대청중학교 출신의 신입생이 몇 명인지를 따진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아마도 감독의 연출이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다. 

벌새는 ‘가난포르노’라는 비판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물론 장점도 많다. 상업영화를 연상케 하는 매끈함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그러나 상술한 약점이 이 영화의 모든 장점을 덮었다. 김 감독의 다음 작품을 주목하겠지만 기대하지는 않는 이유다. ‘벌새’의 별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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