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경제보복 했었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일본 교토에서 니가타로 향하는 ‘귀환 전용 열차’에 탑승하는 재일(在日) 조선인 가족들이 배웅 나온 아이의 꽃다발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떠났다. (사진=마이니치신문)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우리도 일본에 경제보복을 시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과거의 우리는 어땠나를 한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1955년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조총련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들은 곧 재일교포의 북송 운동을 주장하고 나섰다. 일본도 세계대전의 상처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재일교포들 대부분은 일본인 국적도 없었을 뿐더러, 고향 역시 남한 혹은 북한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1956년 북한과 일본은 상대방 국민의 송환에 협력하겠다는 각서를 교환하게 된다.

우리도 전쟁이 막 끝난 시절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에 교포들을 받는데 시큰둥했지만, 북한은 예상외로 매우 적극적이었다. 여기에는 체제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듬해 첫 삽을 뜬 천리마운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북한의 전후 재건을 도왔던 40만 명의 중공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북송사업에 참여했던 사토 가츠미는 “어떤 정치가는 일본이 귀국사업을 지지해야만, 일본이 재일 조선인에게 지급하고 있는 생활보조금을 줄일 수 있다”며, “북송사업은 일본의 국익에 합치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북송사업이 급물살을 타게 되자 우리 정부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재일교포가 북한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남한 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남한에 남아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에서 북한과 연계하며 첩보 활동을 벌일 염려도 있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재일교포들을 남한으로 데려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정부의 딜레마였다.

◆ 이승만 대통령의 무리수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돌연 일본에 대일 무역금지를 실시했다. 무역금지 조치는 사실 종종 쓰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미 1955년에도 대일 무역금지가 하루아침에 단행된 적이 있었다.

오늘날 말하는 FTA니, 포괄적경제협정이니 하는 자유무역주의가 부재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55년 일본이 적성국이었던 중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이를 응징한다는 목적 하에 일본 물품의 수입을 금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살골이나 마찬가지였고, 불과 10일 만에 교역단절 조치는 해제되었다.

3년 후에도 별 차이는 없었다. 1958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비중은 0.5%, 수입비중은 0.3%였지만, 한국의 일본에 대한 수출비중은 무려 60%, 수입비중도 40%에 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명령한 대일무역 금지조치는 결국 한국을 제재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대해 일본 내 민단에서도 “오히려 재일교포의 북송을 돕는 효과를 냈다”며 비판한 바 있다.

재일교포 북송 반대시위. (사진=kbs)

경제보복이 원하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더 큰 무리수가 뒤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북송사업을 주관하는 일본의 적십자센터를 테러하고자 했다.

그러나 테러 계획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김구의 암살자로 알려진 안두희를 포함한 선발대 수십 명이 일본 니가타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시민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전원 체포되었던 것이다. 거제도에서 출발한 후발대는 풍랑으로 모두 사망하기까지 했다. 일본 여론의 빗발친 비난에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이들의 유해를 모두 국립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일이 정부의 지시였음을 후일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결국 북송 사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북송사업 반대 시위도, 막상 북송선이 북한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그동안 무슨 시위가 있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이승만 대통령도 북송선이 떠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성의를 보이면 앞으로 한일회담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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