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저인플레이션 지속
-유로존 해체 주장에 힘 실릴지도

유럽연합의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사진=BBC)
유럽연합의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사진=BBC)

[데일리비즈온 이재경 기자] 유럽 경제의 최근 10년은 스테그플레이션, 즉 장기침체의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수 10년은 또 다른 장기침체의 그늘에서 시름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유럽 경제가 겨우 회복세를 보였지만 결국 그것은 부활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낮은 이자율, 낮은 성장은 이제 뉴노멀이 되었다. 뉴노멀은 새로운 표준을 뜻하는 경제용어다.

이런 탓에 유럽 경제는 종종 일본과 비교된다. ‘잃어버린 20년’으로 통하는 장기불황을 겪은 일본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1990년대 디플레이션 수렁에 빠진 일본 경제는 온갖 통화·재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상궤도를 찾지 못했다. 유럽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 경제 역시 ‘잃어버린 20년’을 향해 곤두박질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현재 유럽 경제가 장기 침체의 주요 증상, 즉 '일본화'가 만연돼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2018년 말 이후 유로존 인플레이션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정한 목표치인 2%에도 한참 못 미쳤다. 지난 6월에는 1.3%까지 떨어졌다. GDP 성장률은 2018년 1.8%로 선방했지만 올해에는 1.2%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게다가 오는 가을 혼란스러운 브렉시트에 직면하게 되면 내년은 사정이 더 악화될 수 있다.

금리 역시 사상 최저치를 유지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재임 8년 동안 한 번도 금리인상을 하지 않고 오는 10월에 사임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ECB가 9월에 오히려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ECB가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부양 행렬에 동참해 9월에야 금리인하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ECB가 마지막으로 금리를 내린 건 유로존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이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유럽의 무기력함이 모든 지역에 걸쳐 동일한 수준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내부가 세계 금융위기로부터의 회복 자체가 균일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013년 유럽연합(EU)의 실업률은 지난 2013년에 2650만 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이후 금융위기 이전 수준보다 낮은 1570만 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유럽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스페인 북서부,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같은 곳은 여전히 금융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ING의 베르트 콜린과 조안나 코닝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의 많은 지역이 이제서야 겨우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들 지역에서의 회복은 지난 수 년간의 초저금리,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무색할 만큼 미지근했다. ECB가 마지막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했던 2011년에 포르투갈의 부채는 정크 상태로 격하되었고 그리스는 또 다른 구제금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일랜드도 바로 그 전 해에 구제금융을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리 인상은 빨라야 2021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증시도 최근 몇 년 사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진=SBS뉴스)

◆ 일본과 유럽의 근본적인 차이

2018년 말 이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물가상승률은 유럽중앙은행(ECB)이 목표로 하는 2%를 한참 밑돌았다. 지난 6월 기준 1.3%에 불과하다. 지난해 유로존 경제 성장률은 1.8%에 그쳤고, 올해는 1.2%까지 둔화할 전망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 있어 내년도 낙관하기 어렵다.

일본과 닮은 점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인구 고령화와 연금 수급자 증가로 소비가 부진하고, 장기적인 저금리 환경에 따른 수익 악화로 은행들이 고전하고 있다는 게 그렇다.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좀비은행'들은 경제 성장에 필요한 대출을 제공하기는커녕 자본을 갉아먹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 최대 경제국 독일에서 가장 큰 은행인 도이체방크가 '제2의 리먼브러더스'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미국 4위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러더스는 2008년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CNN머니는 일본과 유럽의 근본적 차이가 유럽의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경기침체에 대응할 중앙은행과 정부가 단일팀이다. 마음만 먹으면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이 가능하다. 아직 성과가 미미하지만,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그동안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반면 유럽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나라로 구성된 연합체다. 통화정책은 ECB에서 정하지만, 재정정책은 제각각이다. 각국이 EU의 큰 틀 아래 나름의 예산을 편성해 집행한다. 나라마다 요구하는 처방이 다르기 때문에 ECB가 모두의 입맛에 맞는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없다. 통화 연합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보완적인 재정 정책을 조율하기 힘든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을 침체에서 건져내기 위해선 각국 정부가 단합된 재정 부양책을 펼쳐 경기를 띄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제는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연합체의 특성에 기인한다. 독일의 경우 정치적 반대에 부딪힐 공산이 크고, 이탈리아는 정부의 부양 능력 자체에 한계가 있다.

카르스텐 브르제스키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같은 비교적 여유 있는 나라들과 이탈리아 같이 좀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 간의 정치적 분열에 주목하면서, "ECB가 국가의 예산을 조정하고,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실제로 실행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도 지금보다 더 긴밀한 협력에 합의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시간을 질질 끌다간 장기불황에 빠져 더 큰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역내 성장 불평등이 심화하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UBS의 조나단 그레고리 영국 채권투자팀장은 “유로존은 여전히 하나의 실린더에 의지하며 절뚝거리고 있는데도, 도저히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않다”고 지적했다.

브르제스키 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이 또 하나의 '잃어버린 10년'을 향할 경우 유로존이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유럽 경제에 만연한 저성장과 저물가는 나라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국엔 하나의 틀을 해체하자는 세력이 거듭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스트게르 유럽연합(EU) 경쟁담당 집행위원. (사진=연합뉴스)
베스트게르 유럽연합(EU) 경쟁담당 집행위원. (사진=연합뉴스)

◆ 유럽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 이자는 현재 일본보다도 낮다. 이는 이 지역의 장기적 경제 전망이 밝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투자자들이 금리가 계속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JP모건체이스의 존 노맨드 연동자산 기본전략팀장은 “유럽재정위기(European Sovereign Debt Crisis)가 시작된 지 10년 만에, 유럽의 채권시장은 일본이 30년 걸려 도달한 지점에 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이너스 금리는 유럽의 은행들을 계속 압박하는 한편, 유럽 채권 시장의 매력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는 투자자들이 10년 만기 독일 채권을 만기가 될 때까지 보유한다면 손해를 볼 것이 확실하다. 브르제스키는 이런 상황은 지속될 수 없으며, 지속해서도 안 된다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지역의 경제가 하방곡선을 그리면서 각 국가와 유럽 사이의 이해관계의 줄다리기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럽연합이라는 틀에서 유럽을 벗어나게 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저성장과 저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 다른 방식으로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이 틀을 해체해야 한다는 세력들이 다시 부상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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