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구호를 외치는 자나, 그것을 바라보는 자나 전과는 많이 다르게 페미니즘을 느끼고 경험한다. 페미니즘이 그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정치 경제 사회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은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자각과 가치관과 취향, 그리고 그들의 노동과 소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중문화 시스템 속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페미니즘을 경제적·기업적·대중문화적 측면에서 관련 저서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연재를 싣는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인 애슐리 그레이엄이 메인 모델로 나온 패션잡지(사진=인스타그램)
플러스 사이즈 모델인 애슐리 그레이엄이 메인 모델로 나온 패션잡지(사진=인스타그램)

TV의 뉴스 프로그램이 수십 년간 고수하고 있는 고정 구도. 시청자나 언론학자가 여러 번 문제를 지적하고 심지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 들어갔어도 거의 변하지 않는 모습. 그것은 중년의 남성 메인 앵커와 젊은 여성 보조 앵커가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80~90년대에는 거의 아빠와 딸의 나이 차이였다. 여성 진행자는 방송사에 입사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은 20대였다. 

지금은 여성 진행자의 나이가 조금 올라가 대체로 삼촌과 조카뻘인 남오여삼(남성 50대, 여성 30대) 조합이다. 여성신문이 최근 공중파 3사의 28개 뉴스 프로그램 191편을 조사한 결과,  31명 남성 앵커의 평균 나이는 45세, 25명 여성 앵커의 평균 나이는 38세였다. 남성 진행자는 80% 이상이 40대와 50대였는데 여성 앵커는 30대가 43%였다. 방송사 보도국이나 아나운서실에서 지금은 절반에 이를 만큼 여성 종사자가 많아졌고 팀장 부장 등 간부급 자리에도 여성이 많다. 과거에 방송사는 진행자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는 지적에 대해 취재 경험이 많은 여기자가 부족해서라고 변명했다. 과연 그럴까. 지금도 남성은 연륜이 쌓일수록 앵커가 될 가능성이 커지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

공중파든 종편이든 기상캐스터라는 직종이 있다. 그 중에 몇 명이나 환경과 기상학을 전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TV에서 날씨를 전하는 일은 한결같이 젊고 날씬하고 (객관적으로) 미모가 뛰어난 여성만의 직종이 됐다. 외국 방송사에는 중년의 남성 기상 캐스터가 많다. 물론 메인 뉴스도 20~30년 이상 경력의 여성 기자가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이나 유럽 방송계에서 여성이 나이와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더러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런 소송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비행기 여승무원을 봐도 그렇다. 늘씬한 몸매에 미소 띤 얼굴, 쪽을 진 머리 스타일, 몸에 딱 붙는 치마 유니폼, 하이힐을 신은 여승무원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게 사고가 났을 때 승객의 탈출을 돕는 데 유리한 복장일까. 그렇게 보란 듯이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만을 부각하는 근무복을 입혀야 하는 걸까. 비행기 승객은 젊고 키가 크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 승무원에게 신뢰와 호감이 더 간다는 조사가 있긴 한 걸까. 일부 항공사들이 여승무원의 바지 유니폼을 허용하긴 했지만 한참 늦었다. 권투 경기나 레이싱 대회, 신차 발표회 등 주로 남성을 겨냥한 이벤트에는 꼭 노출이 심한 패션의 ‘OO걸’이 등장한다. 여성가족부는 2003년에야 여학생 교복을 치마로만 한정하는 건 남녀 차별의 소지가 있다고 결정했다.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이 사회는 나이는 젊고 몸매는 날씬하고 용모는 예쁜 여성을 보고 싶어 한다. 서비스 직종이라면 그 기준은 더 가혹하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패션이 정치보다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내 연설보다 재키의 옷에 더 집중한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여성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주술을 사회에 퍼뜨렸을까. 아름다움이란 신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기 시작했을까. 자본주의에서 아름다움과 젊음의 유지는 어떻게 불멸의 산업이 될 수 있었을까.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라는 책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정치적 사안이라고 말했다.(사진=하기석)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라는 책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정치적 사안이라고 말했다.(사진=하기석)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이자 페미니즘 학자인 나오미 울프가 쓴 책이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1990년대 미국 페미니즘 연구에서 기념비적 저술인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원제 ‘The Beauty Myth’, 2016년 국내 출간)는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씌우고 그걸 정치적, 상업적으로 이용하는지를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여성이 ‘아름다움의 신화’라는 덫에 빠져 끊임없이 그걸 추구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어떻게 파괴돼 가는지를 추적하고 고발했다. 

울프는 이 책에서 새로운 개념을 주장한다. ‘PBQ(Professional Beauty Qualification)’라는 용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직업에 적합한 아름다움의 자격 요건이라고나 할까. 물론 남성에겐 없다. 울프는 바로 이 PBQ가 여성에 대한 고용과 승진의 차별을 정당화하며, 능력 있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직업적 성공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란 객관적, 보편적으로 분명히 존재해왔다. 한 시대, 한 국가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유사 이래 계속된 생물학적, 문화적, 성적 측면의 진화다. 그런데 저자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적 형태의 압박은 1830년대 산업혁명이 계기가 됐다는 흥미로운 이론을 제기한다. 여성이 처음으로 가정과 가사에서 벗어나 사회와 일터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다.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자 남성들은 일자리 유지에 대한 불안이 생겼다. 여성을 억압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일과 관련지은 여성의 용모나 몸매, 나이에 대한 암묵적 기준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을 정하는 건 힘 있는 남성 집단의 눈이다. 그것은 고용 차별과 유리천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여성의 진출에 위기를 느낀 남성 위주의 기득권 사회체계가 헌법과 법률이 아닌, 막연한 아름다움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일종의 백래시(backlash, 반발)라고나 할까. 그리고 여성이 그 조건을 충족하는 데 끊임없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만들어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경륜과 체중은 성공한 남성에게는 훈장으로 비치지만, 여성에게는 설사 능력이 있다 해도 이제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물겨운 다이어트와 큰 비용의 성형 수술이 필요하다. 당연히 관련 산업은 날이 갈수록 번성하게 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두 가지 산업이 다이어트와 노화방지 산업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같은 여성끼리도 위화감이나 상실감, 외모 경쟁에 대한 압박감을 준다. 

저자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무기’이며, 아름다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안이 돼버렸다고 결론짓는다. 또 “아름다움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남성의 지배를 온존시키는 마지막 남은 가장 좋은 신념 체계”이며 “문화적으로 강요된 신체 기준에 따라 여성의 가치를 매겨 줄을 세운다는 점에서 권력 관계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여성 앵커나 스포츠 경기 또는 행사장에서의 ‘OO걸’, 우리나라 항공사들이 고용하는 젊고 키 크고 아름답고 날씬한 여승무원들이 PBQ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종편의 시사나 예능 프로그램에는 변호사, 교수 같은 전문직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공통점은 연예인이 아닌 그들의 용모도 일반적 기준에서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는 점이다. 설사 좀 뚱뚱했다 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몇 달 만에 날씬해진다. 이런 관행은 그렇지 못한 보통 여성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며 성형과 다이어트를 종용한다. 여직원에게만 엄격한 드레스 코드나 화장 규칙을 요구하는 회사도 아직 적지 않다. 여성의 용모에 대한 우리 사회와 대중문화의 지나친 관심은 결과적으로 여성을 옭죄는 것이다. 

여성들은 긴 세월 그 압박에 적응하면서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양상이 진행되고 있다. 미모와 몸매가 ‘자격’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어느 시절보다 강한 페미니즘 트렌드는 배경과 힘이 돼주었다.

인스타그램에서 ‘#body positive’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
인스타그램에서 ‘#body positive’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

인스타그램에 ‘#body positive’ 라고 쳐보자. 놀랍다. 1,000만 장이 조금 넘는 게시물이 뜬다. 주로 뚱뚱한 여성의 수영복이나 일상복 차림 사진들이다. 이건 몰카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당당하게 터질 듯한 가슴, 살이 접히는 허리, 두꺼운 허벅지를 과시하고 있다. 4~5년 전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보디 포지티브(몸 긍정성)’ 캠페인이다. 사회나 미디어가 제시하는 아름답고 멋진 몸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뚱뚱하거나 늙고 주름진 그대로의 모습을 자발적으로 올리는 운동이다. “내 몸이 뭐 어때서? 나는 이대로의 내 몸이 좋아!”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진 탈코르셋 시위도 같은 맥락이다. 빅 사이즈 모델들이 패션 잡지 커버를 장식하고 유명 모델의 반열에 올랐다. 가슴을 압박하는 브래지어는 착용하기 편안한 브라렛이나 기능성 제품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영국 런던 옥스포드 스트릿 나이키 매장에 등장해 논쟁을 촉발한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 (사진=나이키)
영국 런던 옥스포드 스트릿 나이키 매장에 등장해 논쟁을 촉발한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 (사진=나이키)

2019년 6월 영국 런던 쇼핑가인 옥스포드 스트릿에 있는 나이키 매장에 뚱뚱한 마네킹이 등장했다. 언론과 소셜에서는 호평과 비난이 엇갈렸다. 여성은 날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에서 대다수 여성은 지지했다. 그런데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뚱뚱한 마네킹은 신체의 비만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존중한다는 자세는 좋지만 거기까지인 거지, 당당하게 드러냈다 해서 모든 몸이 아름답고 건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지는 틀렸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대의 트렌드에 편승한 상업자본주의의 광고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성의 몸은 섹시한 몸에서 당당한 몸으로 가치가 옮겨가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날씬하지도 않고 잘 생기지도 않은 몸과 얼굴을 공개하는 건, 이 사회가 요구하는 불가능한 미적 기준에 더 이상 나를 끼워 넣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희생하지는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인증샷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비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