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구호를 외치는 자나, 그것을 바라보는 자나 전과는 많이 다르게 페미니즘을 느끼고 경험한다. 페미니즘이 그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정치 경제 사회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은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자각과 가치관과 취향, 그리고 그들의 노동과 소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중문화 시스템 속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페미니즘을 경제적·기업적·대중문화적 측면에서 관련 저서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연재를 싣는다. 

요즘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사진 없는 이력서를 내게 한다. 이른바 스펙을 보지 않겠다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이다. 학벌이나 자격증처럼 외모도 하나의 스펙으로 여겨진 건 분명하다. 그럼 이제 외모는 스펙이 아닌 걸까. 

지난달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인 사람인이 기업의 인사 담당자 3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는? 열 명에 아홉인 88%가 외모가 당락에 영향을 미친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성별로는 여성이 92%로 남성(83%)보다 외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체적으로는 ‘인상’이 75%, ‘몸매’가 9%, ‘이목구비’가 8%, ‘옷차림’이 4% 순이었다. 

결국 마지막 관문인 면접장에선 상대적으로 용모가 좋은 사람이 합격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진 없는 이력서는 쇼에 불과했다. 구직자 중 여성 62%, 남성 48%는 실제로 외모 때문에 채용 과정에서 차별을 느꼈다고 답했다.

외모지상주의가 사라진 게 아니다. 외모지상주의는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이다. 영어로는 보통 루키즘(lookism)이라고 말한다. 인종·성별·종교·이념·빈부에 이어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차별 요소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는 외모차별주의와 동의어다.

외모지상주의의 사이클은 대체로 이렇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외모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압박(대중문화,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몸)→외모를 기준으로 한 인간 가치와 경쟁력의 서열화→성형, 미용, 다이어트, 헬스, 패션 시장의 팽창→뷰티 산업에서의 빈부격차→가치관의 혼란과 상실감의 확대. 이런 현상은 대중문화와 인터넷, 휴대폰,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여성들이 몸매와 용모를 과시하거나 비교하는(또는 비교당하는) 일이 수월해지면서 빠른 속도로 일반화됐다.

외모강박에 걸린 여성 이야기를 하는 러네이 엥겔른 교수의 TED 강연과 국내 번역된 그의 저서.(사진=TEDxUConn, 교보문고)
외모강박에 걸린 여성 이야기를 하는 러네이 엥겔른 교수의 TED 강연과 국내 번역된 그의 저서.(사진=TEDxUConn, 교보문고)

외모지상주의는 필연적으로 외모강박을 불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심리학과 러네이 엥겔른 교수의 TED 강연 ‘유행성 외모강박증(An Epidemic Of Beauty Sickness)’이 유명하다. 그는 외모강박을 전염병(epidemic)으로 표현했다. 여성이 외모를 가꾸느라, 또는 스스로 못 생겼다고 생각해서 희생하는 시간과 돈, 기회, 에너지에 대해 신랄하게 이야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결론은 간단명료하다. “여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 공해를 극복해야 한다.”

엥겔른 교수는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2017년 국내 출간)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 화장품 회사 도브는 2003년 “나이, 체격,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리얼 뷰티(Real Beauty)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모델이 아닌 다양한 일반 여성이 출연했다. 얼핏 여성의 외모강박을 치유해줄 마법의 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가 정말로 여성이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언뜻 듣기엔 꼭 예쁘거나 날씬하지 않아도 된다며 여성을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역으로 보면 “그래, 문제는 역시 외모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잘 빠진 몸매와 큰 키, 하얀 얼굴, 탄력 있는 피부만이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사회에서 이 캠페인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모순이다. 이런 광고는 오히려 여성이 외모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은 외모가 여성의 절대적 평가 기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는 것이다. 메시지에 숨어있는 교묘한 함정이다. 

저명한 미디어 연구자이며 문화비평가인 수전 더글러스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페미니즘과 성차별에 대한 메시지가 변화해오면서 여성에게 어떤 굴레를 씌웠는지를 연구한 학자다. 그는 저서 ‘배드 걸, 굿 걸’(2016년 국내 발간)에서 외모지상주의와 외모강박은 순전히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모순적 태도 탓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의 영어 원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원제는 ‘Enlightened Sexism’(진화된 성차별주의)이다. 성차별은 이제 과거의 일이라고 하면서 교묘하게 차별하는 것을 ‘진화된 성차별’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성평등은 완성됐거나 돼간다는 미디어의 ‘유혹적’ 메시지에 대해 통쾌하고 도전적으로 칼을 들이댄다.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이 불기 시작하면서 미국에서는 1980~1990년대에 외모와 능력을 겸비한 여성의 이미지로 무장한 ‘걸 파워’ 바람이 대중미디어에 불었다. 스파이스 걸스는 섹시한 무대의상을 입고 ‘워너비(Wannabe)’를 불렀다. 남자들을 향해 “내가 원하는 걸 말해줄게. 네가 내 연인이 되고 싶다면 줘야 해.”라고 노래했다. 

대중미디어는 남성을 능가하는 ‘걸 파워’를 만들어냈다. 데미 무어가 주연한 영화 ‘G.I. 제인’과 샤론 스톤이 주연한 영화 ‘원초적 본능’.(사진=각 영화 스틸컷)
대중미디어는 남성을 능가하는 ‘걸 파워’를 만들어냈다. 데미 무어가 주연한 영화 ‘G.I. 제인’과 샤론 스톤이 주연한 영화 ‘원초적 본능’.(사진=각 영화 스틸컷)

남자보다 강한 살인 병기, 악을 응징하거나 세상을 구할 숙명을 지닌 ‘여전사’들도 자주 등장했다. 데미 무어는 ‘G.I. 제인’과 ‘어 퓨 굿 맨’에서 그랬고, 샤론 스톤은 ‘원초적 본능’에서 관능미를 뿜어대며 남자를 정복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전히 범죄와 성폭행과 학대에 시달리는 여성이 압도적 다수였고 가해자는 늘 남성이었다. 

TV 드라마에서는 성공한 여성들이 화면을 누볐다. 그들은 아이비리그를 나온 변호사거나 유명 앵커나 유능한 외과 의사, 홍보 전문가, 또는 대통령 후보이거나 FBI 요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 전문성은 그들의 사랑과 연애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작은 성취감으로 묘사됐다. ‘파워’는 시들해지고 ‘걸’이라는 부분만 확대된 것이다. 그 무렵 미국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한 직업은 대다수 돌봄 서비스나 감정노동 같은 것이었다. CEO나 고소득 전문직, 고위층은 극소수였다. 

저자는 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엠마 왓슨과 같은 여성 셀렙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은 아름답고 날씬하고 섹시한 ‘여성성’에 대한 남성들의 기대를 그녀가 충족시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유명 연예인 페미니스트들의 언행이 미디어로 퍼져 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이 외모지상주의와 성차별적 사회에 포섭돼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으로 대중매체에는 여성의 몸매나 외모를 대상화해 소비하는 각종 예능이나 쇼,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줄을 이어 생겨났다. 이것들은 여성에게 “어떤 여자가 인기 있고 어떤 여자가 욕을 먹는지, 덜 예쁘거나 주장이 세거나 충분히 날씬하지 않은 여자는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각인시켰다.

진화된 성차별은 “여자는 무엇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성은 원하는 어떤 존재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여성스러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슈퍼우먼이나 가능한 일이다. 겉으로는 성평등을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시장에서 이윤을 추구하거나 페미니즘을 무효로 되돌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중매체는 끝없이 여성성을 소비하면서도 섹슈얼리티는 위험하니 관리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또한 반복했다. 섹시한 여성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외모를 가꾸는 여성은 헤픈 여자라고 모함했다. 모성애는 아름답다고 하면서 아줌마 근성은 조롱했다.

현대 여성은 유능함과 아름다움 두 가지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술에 걸렸다. 저자는 그 질곡에서 벗어나는 일이 진정한 여성해방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은 잘 안다. 날씬하지 않은 여성은 게으르거나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남자들이 생각한다는 걸.

‘탈코르셋 운동’은 아마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서, 또는 스스로의 외모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은 거리에서 관음의 표적이 되는 오브제들을 스스로 벗어던졌고 노출했다. 앞에 언급한 러네이 엥겔른 교수의 결론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 공해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엥겔른 교수의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커리어와 외모, 그 양단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이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여성들이여, 거울을 보지 마라. 허벅지 두께를 걱정할 게 아니라 허벅지 힘을 생각하라. 내 몸은 관음의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 생산할 수 있는 당당한 신체라는 걸 믿어라. 그리고 당신의 여자아이에게도 예쁘다고 말하지 마라. 그 아이의 다른 사랑스런 자질을 칭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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