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구호를 외치는 자나, 그것을 바라보는 자나 전과는 많이 다르게 페미니즘을 느끼고 경험한다. 정치 경제 사회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은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금기의 언어에서 해방돼 거리에서 치열하게 행진 중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자각과 가치관과 취향, 그리고 그들의 노동과 소비 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중문화 시스템 속에서 페미니즘은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페미니즘을 경제적·기업적·대중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재를 싣는다. 

영국의 문호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대표작 중에 ‘자기만의 방’(원제 ‘A Room of One’s Own, 1929년)이라는 자전적 에세이가 있다. 페미니즘 문학의 기념비적인 이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버지니아 울프(사진=위키피디아)
버지니아 울프(사진=위키피디아)

“왜 언제나 남성들만이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지는가. 여성은 아이들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데. 만약 여성이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만 찾을 수 있다면 미래에는 여자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으리라. 그 두 개의 열쇠는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적인 소득과 자물쇠가 딸린 자기만의 방이다.”

500파운드는 현재 시세로 4000만 원 정도다. 그 정도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방해받지 않고 사유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경제적·정신적으로 자립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그 당시 여성에게 문학적 재능은 과분하거나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가부장제와 남성의 지적 우위, 지식인 사회의 위선, 성적 불평등은 여성에게 글을 쓸 여건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여성은 훌륭한 작품을 써도 늘 아웃사이더였다. 작가로서 인정받기 어려웠다.

제인에어(사진=교보문고)
제인에어(사진=교보문고)

울프의 전 세대 영국 작가 샬럿 브론테(1816~1855)는 ‘제인 에어’를 출간할 때(1847년) 커러 벨이라는 남성 필명을 사용했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그 위대한 소설 ‘오만과 편견’(1813년)은 가명으로 발표됐다. 미국의 빼어난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평생 은둔하며 독신으로 살았는데 생전에 단지 네 편의 시만 발표했고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올 상반기 국내 개봉한 외국 영화 중에 ‘더 와이프’와 ‘콜레트’란 여성 영화 두 편이 있다. 재능은 뛰어나나 남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유령작가로 살아야 했던 두 여자의 이야기인데,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개봉했다. ‘더 와이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선배 여류작가가 주인공에게 충고하는 말이다. “쓰지 말아요. 주목받을 거라는 꿈도 꾸지 말아요.” 주인공은 결국 대학에서 자신에게 문학을 지도했던 남편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남편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영화 더 와이프(위)와 콜레트(아래) 영화 스틸컷
영화 더 와이프(위)와 콜레트(아래) 스틸컷

두 여주인공의 선택은 다르다. ‘더 와이프’의 주인공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 비밀을 덮지만, ‘콜레트’의 여주인공 시도니 콜레트(실존인물)는 소송을 통해 자기 이름을 찾는다. 한국 최초의 여류작가 김명순(1896~1951)은 당시 문단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두운 인생을 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2018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스페인의 여성 노동조합원 530만 명이 동맹파업을 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였다. 스페인 여성이 무급 노동, 즉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시간은 남성의 두 배, 유급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은 여성은 6.7%, 남성은 고작 0.6%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페인 여성들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실업률도 높았다.

여성의 노동과 그 인정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여성 경제학자 마이라 스트로버는 평생 노동의 관점에서 성차별과 싸워온 학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저서 ‘뒤에 올 여성들에게’(원제 Sharing the Work, 2018년 국내 발간)에서 자신이 겪은 차별을 고발한다. 그녀의 박사 논문을 심사한 면접관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거면서 왜 박사 학위를 따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버클리대학은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종신교수 트랙 고용을 거부했다. 대학에서는 남성 동료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된 그녀는  성별에 따른 직업 분리, 가사노동의 가치 정량화, 차별 비용 등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하며 경제학 분야에 페미니즘을 확장시킨 선구자가 됐다. 

스트로버의 연구 중 유명한 것이 있다. ‘상대적 매력도 이론’이다. 여성이 특정 직종에 많이 종사하는 것은 여성이 그 직종을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이 그 직종에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직업에는 본질적으로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남성은 어떤 직종이 임금이나 승진 기회에서 매력이 떨어지면 다른 직종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여성이 메우게 된다는 것이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사진=교보문고)
뒤에 올 여성들에게(사진=교보문고)

남성의 세계나 다름없던 경제학계에서 스트로버는 학문적 삶과 실제적 삶 모두에서 성차별에 도전하고 개선시키며 여성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교수의 꿈을 이루라고 지지했던 의사 남편이 막상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지 않자 이혼을 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존중하는 사람과 재혼해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여성의 가사와 육아 등 무급 노동이 사회적 공헌에 비해 훨씬 적은 보상을 받는다며 경제 분석에서 노동의 젠더 분업은 필수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은 재생산 노동으로 불린다. 가사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고, 전업주부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출산과 양육과 가사는 이력서의 경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 재생산노동은 공장과 사무실에서 이뤄지는 생산만큼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가치에 대한 인정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해줘야 하는 걸까?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어떻게 계량화해야 하는 건가? 
 
“자본은 여성을 희생시켜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먼저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획득했고, 여성들이 이에 거부하는 투쟁을 일으키기는커녕 인생 최고의 일로 가사노동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

여성행동주의자인 실비아 페데리치가 쓴 ‘혁명의 영점’(2013년 국내 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국제적 캠페인인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운동’에 몸담았던 저자는 가사노동은 이 노동을 통해 재생산되는 노동력만큼의 가치를 갖기 때문에 생산노동과 동일하게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생산노동의 최종 수혜자는 자본이므로 총자본의 대변인인 국가가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청소기를 돌리면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가사도우미가 그 일을 하면 그 노동에는 갑자기 시간당 1만 원의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가정과 일상생활 전반에서 더 큰 부담을 짊어지는 쪽은 언제나 여성이다. 아내의 노동은 국가경제의 안녕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 가족의 안녕에는 가장 중요하다. 통계청이 2018년에 발표한 ‘가계생산 위성계정 개발 결과(무급 가사노동가치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연간 무급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여성이 1인당 1077만 원, 남성이 347만 원으로 여성이 세 배가 넘었다. 하루 중 가사에 할애하는 시간은 여성이 185분, 남성이 42분이었다. 

왜 우리 사회는 여성이 직장을 잃는 것을 따지는 데는 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정작 남성들이 가정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 국가는 경력 단절 여성의 일터 복귀 정책은 고민하지만, 남성의 일터 탈출 정책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일하는 엄마는 ‘워킹맘’으로 불리지만 ‘워킹 대디’란 말은 없다.

페미니즘의 궁극은 결국 이것일지 모른다. 결혼을 선택한 여성의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인정과 제도적 배려, 그리고 맞벌이 가정이든 아니든 남성의 균등한 가사 노동 참여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 

그게 이뤄질 시점은 언제일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불과 일백 년 전만 해도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해야 했던 여성 작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 셰익스피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연간 500파운드 이상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이 많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 신장과 사회 진출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왔다. 하지만 남성에게는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났다. 남자들은 여전히 일터에서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가정에서는 지나치게 적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페미니즘은 ‘백래시’를 경계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온다.” 미국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의 명저 ‘백래시(Backlash)’에 나오는 말이다. 페미니즘은 결국은 남성으로 귀결되는 문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생만 바꾸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을 바꾼다.  

페미니즘이 만발하고 있는 2019년, 여성들은 아직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차라리 나에게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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