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경제학④] 젠더 감수성이 없는 기업은 찍힌다
[페미니즘 경제학④] 젠더 감수성이 없는 기업은 찍힌다
  • 하기석 편집위원
  • 승인 2019.05.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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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구호를 외치는 자나, 바라보는 자나 전과는 크게 다르게 페미니즘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이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금기의 언어에서 해방돼 거리에서 치열하게 행진 중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노동과 소비, 가치와 취향과 불가분의 관계다. 남녀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분명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속에서 페미니즘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의 절반이 여성이듯 페미니즘은 거의 모든 분야의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페미니즘을 경제적·기업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재를 싣는다. 

2018년 한 해 동안 포털 네이버의 국어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낱말은 ‘페미니스트’였다. 2017년에는 2위였다가 드디어 1위로 올라섰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런 사회적 관심을 기업이 모른 척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기업의 마케팅 공식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실제로 많이 변화하기도 했다. 기업의 마케팅 목록 첫 번째에 이제 ‘젠더 감수성’이 자리 잡은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때만 해도(시리즈③ 참고) 젠더 감수성이란 용어는 없었다.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은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생각을 그들 편에서 이해하는 정도’를 뜻한다. 요즘 성폭력 재판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남녀 간의 성 갈등이 예전부터 없던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과 미투 운동, 다른 성에 대한 혐오가 큰 사회문제가 되면서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2016년 출시한 넥슨의 게임 ‘서든어택2’는 여성 캐릭터의 선정성이 문제가 돼 86일 만에 서비스를 종료해야 했다.(사진=넥슨)
2016년 출시한 넥슨의 게임 ‘서든어택2’는 여성 캐릭터의 선정성이 문제가 돼 86일 만에 서비스를 종료해야 했다.(사진=넥슨)

최근 시장에서 젠더 감수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업이 호된 곤욕을 치르는 사례가 많아졌다. 성차별 성폭행 논란을 일으킨 기업도 마찬가지다. 여성 소비자들이 시장에서 직접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여성적이거나 여성혐오적 광고나 상품을 만드는 기업, 그런 문화콘텐츠에 불매운동으로 맞선다. 반페미니즘적 인물을 모델로 세우거나 사내 성폭력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간부가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여혐 기업’도 타깃이 됐다. 

4년간 300억 원을 들여 2016년 출시한 넥슨의 게임 ‘서든어택2’는 여성 캐릭터의 과도한 노출이 문제가 돼 성 상품화 논란으로 이어졌고 86일 만에 서비스를 종료해야 했다. 여성 캐릭터를 게임에서 삭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임 애호가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출시마저 물 건너갔다. 래퍼 산이는 2018년 말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비하 발언을 한 이수역 폭행사건 동영상을 공유했다. 그 후에도 여성혐오 발언, 노래 가사 논란 등으로 여성들에게서 공격을 받아 공식 사과하고 공연을 취소해야 했다. 

2015년 영국의 한 종합영양제 회사는 비키니를 입은 날씬한 백인 여성 사진과 함께 ‘너 해변 갈 몸은 준비됐니?(ARE YOU BEACH BODY READY?)’라는 지하철 광고를 게재했다가 조롱을 당했다. 수많은 패러디 광고가 나왔다. 여성단체는 다양한 인종의 뚱뚱한 여성이 웃고 있는 사진 옆에 ‘우리 몸은 준비돼 있어(WE’RE BEACH BODY READY)’라는 문구를 넣어 비꼬았다. 

2015년 영국의 종합영양제 회사가 여성의 날씬한 몸을 강조하는 광고를 지하철에 내걸자 이를 조롱하는 패러디 광고들이 쏟아졌다.(사진=Protein World, Navabi)
2015년 영국의 종합영양제 회사가 여성의 날씬한 몸을 강조하는 광고를 지하철에 내걸자 이를 조롱하는 패러디 광고들이 쏟아졌다.(사진=Protein World, Navabi)

성폭력 논란이 일었던 가구업체 한샘, 성차별 항의집회에 참석한 여직원을 해고한 이디야 커피, 여성혐오 논란을 빚은 개그맨을 모델로 기용한 메이크업 브랜드 맥(MAC) 등도 곤욕을 겪었다. 

그 반대로 여성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마케팅이나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인 여성이 남성한테서 공격을 받는 ‘백래시’도 나타났다. 2018년 영화 ‘오션스8’은 모든 주인공을 여성으로 내세웠다가 원작의 흥미를 잃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2019년 3월에 개봉한 ‘캡틴 마블’도 박스오피스를 강타했지만 처음으로 여성(브리 라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국내외에서 ‘페미니즘 슈퍼 히어로’ 영화, ‘꼴페미’ 영화라는 악평과 싸워야 했다.

영화 캡틴 마블 포스터.
영화 캡틴 마블 포스터.

배우 정유미는 조남주 작가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출연하기로 하고,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그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의 악플에 시달렸다. 가수 겸 배우 수지가 유튜버 양예원씨가 당한 성폭력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하자 그 게시판에 ‘수지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바로 올라왔다. 성 대결이 심화하다 보니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발언만으로도 생업의 안위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여러 사례에서 보듯 기업이 젠더 감수성을 잘못 건드리면 오래 쌓아 올린 평판과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져 내린다. 반대로 여성 친화적이거나 신선한 남녀평등적 메시지를 담은 상품은 호평을 받는다. 페미니즘 정서가 여성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강력한 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행위에 동참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다. 

여성 소비자의 존재와 영향력을 증명하기 위한 캠페인(사진=여성소비총파업)
여성 소비자의 존재와 영향력을 증명하기 위한 캠페인(사진=여성소비총파업)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 소비자 운동을 통해 남녀 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여성연대 행동도 종전과 높은 강도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소비총파업’이라는 캠페인이 2018년 7월부터 시작됐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는 슬로건에서 보듯 시장에서 평가 절하된 여성 소비자의 존재와 영향력을 증명하자는 것이다. 아직 효과가 크진 않지만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 일절 소비를 하지 말자는 캠페인이다. 1975년 아이슬란드의 여성총파업을 모티브로 삼았다.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40%가 넘는 성별 임금 격차에 반발해 파업을 벌여 여성이 일손을 놓으면 사회가 마비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를 도입했다. 

여성혐오기업총공 등 단체는 한 달에 두 기업씩 반여성 기업을 선정해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불매 운동을 벌인다. BHC, 공차, 스타벅스 등이 여성비하 광고 등의 이유로 총공(총공격)의 대상이 됐다. 여성의 날인 3월 8일을 기념해 소비 대신 ‘38’로 시작하는 적금액을 납입해 여성운동에 동참하자는 ‘#38적금인증’ 운동도 시작됐다.

여혐 이슈가 발생한 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불매운동은 다른 기업에도 즉시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기업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의식을 잠재적으로 깔고 여성을 소비의 적극적 주체로 대접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제 광고나 모델 선정, 홍보 문안 등에서 매우 세심한 수준의 젠더 감수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하지만 여성 소비자의 눈은 예리해졌다. 여성의 호감을 지나치게 의식해 페미니즘을 단순히 마케팅의 수단으로만 삼으면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여성의 지갑을 열기 위해, 의식 있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위해 페미니즘을 팔고 있다는 혐의를 받으면 안 된다. 마케팅이 지나치면 페미니즘의 본질과 가치가 훼손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지나친 상업화와 대중화를 비판하는 ‘시장 페미니즘’ 논란이다. 거꾸로 남성 역차별이란 지적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여성 소비자 입장에서는 페미니즘을 구매하는 행위가 진정 이 사회에서 성차별이 줄어들고 여성의 삶이 보다 평등해지는 수단이 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결코 상품이나 마케팅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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