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정대가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원정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 등반대장 프릿츠 비스너는 K2 정상을 무산소 등반을 시도하였다.

■ 데이비드 로버츠ㅣ출판년도 1986년ㅣ쪽수 237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 데이비드 로버츠ㅣ출판년도 1986년ㅣ쪽수 237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1939년 미국의 K2(8,611m) 원정대는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글과 이야기, 의혹을 남겼다. 세계 초등정을 눈앞에 두고 실패한 이 등반대에서 어떤 일이 왜 벌어졌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었는가 하는 추측과 의혹은 지금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원정대가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원정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1939년 7월 19일 오전 9시경, 등반대장인 프릿츠 비스너와 셰르파인 파상 라마는 K2 정상을 향해 7,900미터 지점의 캠프9을 떠났다. 아직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눈과 얼음, 바위지대를 무산소로 오르고 있다. 39세의 비스너는 전설적인 클라이머로 그의 생애 최고의 컨디션으로 줄곧 선두에서 루트를 개척했다. 고소로 인해 다소 힘들게 진행되었지만 아이젠과 피켈, 피톤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장갑을 벗고 등반해야 하는 민감하게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오후 늦게 그들은 8,400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정상까지는 이제 200여 미터가 남았을 뿐이다. 비스너는 대단한 환희에 찼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고봉 등정에 성공한 원정대는 없다. 에베레스트와 K2에 수많은 원정대가 도전했고 많은 산악인이 희생되었지만, 무산소 고봉 등정은 불가능하다는 확신만 키울 뿐이었다.

비스너는 시간이 늦긴 했지만 몸의 상태가 좋았고 날씨도 의외로 좋아 밤늦게 하산해도 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등반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나 파상 라마는 밤에 등정하면 신이 노한다면서 다음날 등정하자고 비스너를 설득시켰다. 비스너는 단독으로라도 등반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등반 윤리는 파트너와 끝까지 동행한다가 원칙이었고, 캠프9에는 충분한 식량과 연료가 비축되어 있어서 비스너는 단독행을 포기했다. 다음날은 틀림없이 등정에 성공할 거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시 이 고도까지 올라 오지 못했다. 대신 그의 인생 중 가장 혹독한 상황을 경험했다.

비스너는 1900년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 후 알프스로 이주하면서 1920년대에 괄목할만한 초등정들을 이뤘다. 그는 1929년에 미국으로 이민갔고 화학물질 사업에 전념했다. 클라이밍도 계속 하면서 유럽의 알피니즘을 미국 친구들에게 전파했다. 그러나 등반 기술의 발달이 유럽보다 10여 년 늦은 미국인들에게 비스너의 행동과 철학은 잘 이해되지 못했다.

비스너는 1932년 미국의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해서 7,0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고, 1937년에는 당시 북미 대륙에서 최고의 난이도였던 데블스 타워와 마운트 워딩턴을 초등정했다. 1938년 K2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었지만 사업관계로 참가하지 못했고, 1939년 원정대에서는 등반대장으로 선임되었다. 비스너는 1938년도의 원정대원들이 그를 외면하고 비협조적이어서 대원 선발과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등반이 시작되면서 비스너는 대원들에게 화합과 팀워크를 등반 성공의 제일 조건으로 강조했다. 처음 5주간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1938년 미국 등반대의 기록이 있어서 정보가 상세했고 그들이 당시 구축했던 캠프 사이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비와 식량, 연료 등이 각 캠프로 원활하게 이동되고 저장되었다.

모든 텐트는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대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거의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다. 비스너는 대원들을 엄격하게 대했고 경량의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고집했다. 그는 클린 클라이밍clean climbing의 신봉자로서 워키토키는 물론 산소통마저 베이스캠프에 가져오지 않았다. 비스너와 울프, 세 명의 셰르파는 캠프7에 도착해서 대기했고 두란스와 네 명의 셰르파도 캠프6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두란스는 다음날 아무 보고없이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워키토키 등의 연락 수단이 없는 비스너로서는 두란스의 하산을 막을 방법이 없다. 7월 19일, 8,400미터까지 진출한 비스너는 파상 라마의 간곡한 요청으로 등정을 포기하고 캠프9으로 내려오는데 하산이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았다. 그들은 캠프9에서 하루를 더 쉬고 7월 21일, 눈사태 위험이 덜해 보이는 걸리쪽으로 루트를 수정하고 두 번째 등정에 나섰다.

변경된 루트는 눈이 단단하게 크러스트 되어 있었고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더구나 비스너의 아이젠이 부서지는 바람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비스너는 비상 방법으로 스텝 커팅으로 오르지만, 무척 힘들고 어려운 구간이어서 더디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들은 다시 캠프7으로 돌아왔다. 7,500미터 지점에 있는 캠프7에 어렵게 내려오니 이상한 모습이 그들을 맞이했다. 캠프의 상태가 파손되고 난장판인 것이다. <2편에서 계속>

■ 글 |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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