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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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은 구호를 외치는 자나, 바라보는 자나 전과는 크게 다르게 페미니즘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이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금기의 언어에서 해방돼 거리에서 치열하게 행진 중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노동과 소비, 가치와 취향과 불가분의 관계다. 남녀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분명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의 절반이 여성이듯 페미니즘은 거의 모든 분야의 시장에 영향을 미치며 상업화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재를 싣는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 저술인 그 유명한 ‘국부론’(1776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이 말은 합당할까? 애덤 스미스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가 생각한 세상은 단 하나의 경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성만의 노동이 의미를 갖는 경제였다. 

그의 저녁 식탁은 순전히 이익을 추구한 상인들의 덕이었을까?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피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평생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저녁 식탁도, 그 책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이 돈을 벌 수 있던 것도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한 그들의 아내 덕이다. 스미스씨의 저녁을 차려준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들 말하지만, 여성은 역사 이래 늘 일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노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경제학은 남성 학자가 지배해왔다지만, 왜 주류 경제학에서 세계 인구의 절반이 누락되었을까? 그렇다면 이 학문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 스웨덴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인 카르리네 마르살이란 사람이다. 그가 쓴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원제 Who Cooked Adam Smith’s Dinner?, 2017년 국내 발간)라는 책에서다. 저자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왜 GDP에 포함되지 않는지를 따지며,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제 페미니즘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페미니즘을 경제학에 접목하면 성불평등의 문제부터 인구 증가, 복지 시스템, 노령화 사회, 노동 인력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국부론이 나온 지 250년이 흘렀다. 당시의 시장은 오직 남성에 의해 생산되고 형성되고 소비됐다. 지갑을 쥔 사람은 남자였다. 재원의 분배도 남성이 했다. 1900년대 중반에 들어서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기업은 비로소 여성의 지갑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0년대 들어 여성의 지갑은 점차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 두터워지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뒤지지 않는 소비계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부터 강렬하게 불어오기 시작한 페미니즘과 맞물리며 그들의 소비 행태도 ‘페미니즘적 소비’가 되기 시작했고 시장에서 영향력을 갖게 됐다. 독립적 경제주체가 된 여성들은 그들 방식의 소비를 통해 페미니즘 운동을 펼치고 페미니즘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실천해가고 있다. 

소비 행위에 신념과 가치가 연결된 것을 ‘미닝 아웃(meaning out)’이라고 한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2018년 한국 사회의 소비 트렌드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미닝 아웃은 전통적 소비자 운동인 불매운동이나 구매운동에 비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놀이나 축제 같은 특징을 갖는다.   

요즘 한국 여성들은 페미 굿즈(goods)를 사고,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즘 영화나 연극을 보는 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도 남성의 시선, 사회의 통념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해졌다.

출판 시장에서 페미니즘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 판매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천 권 남짓하던 것이 지금은 10만 권 이상 팔린다. 강남역 10번 출구 남녀공용 화장실 살인사건이 발생한 2016년부터 한 해에 거의 100권 이상의 페미니즘 서적이 출간된다. 구매자는 80%가 여성, 그중에서도 20대 여성이다. 그 상징은 2010년대 첫 밀리언셀러가 된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소설을 두고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소설은 많지만, 마침내 정치를 해낸 소설은 드물다”고 평했다. 

페미니즘 코드는 영화의 흥행에 중요한 변수다. 여성 관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여성 영화 ‘미쓰백’.(사진=미쓰백 스틸컷)
페미니즘 코드는 영화의 흥행에 중요한 변수다. 여성 관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여성 영화 ‘미쓰백’.(사진=미쓰백 스틸컷)

영화나 게임, 웹툰 등도 여성을 어떤 캐릭터와 역할로 설정하는가 하는 페미니즘 코드가 흥행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친여성적이면 적극 호응한다. 이지원 감독의 여성 영화 ‘미쓰백’이 스크린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자 ‘쓰백러’라고 자칭한 여성들이 연대해 영화관을 대여해 단체관람을 하고 영혼 보내기(좌석을 예매하고 영화관에 가지는 않는 것) 운동을 펼쳤다.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어 70만 명이 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도 여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박훈정 감독의 누아르 ‘VIP’(2017년)는 등장 여성을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그려 여성 혐오라는 비판을 받았고, 반면 여성의 액션을 그린 박훈정 감독의 ‘마녀’(2018년)는 흥행에 성공했다. 할리우드 공포영화 ‘할로윈’도 페미니즘 영화로 변신했다. 여성들은 더 이상 비명만 지르며 무기력하게 죽어가지 않고 남자들을 대신해 용감하게 살인마와 싸운다. 

2014년 파리 그랑팔래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는 패션에 페미니즘을 입힌 첫 이벤트다. 파리 거리를 재현한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페미니즘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샤넬 유튜브 캡처)
2014년 파리 그랑팔래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는 패션에 페미니즘을 입힌 첫 이벤트다. 파리 거리를 재현한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페미니즘 시위를 하고 있다.(사진=샤넬 유튜브 캡처)

패션계는 페미니즘에 가장 민감하다. 이미 2014년 가을 샤넬 패션쇼 런웨이에서는 모델들이 페미니즘 피켓을 들고 워킹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크리스찬 디오르가 만든 ‘We Should All Be Feminists’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는 지구촌의 거리 패션이 됐다. 패션쇼에서 시니어 모델이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당당하게 워킹 한다. 거추장스러운 와이어와 패드를 없앤 브래지어 ‘브라렛’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남성이 유두를 가리기 위해 쓰던 니플패치가 여성에게 인기다. 여성의 가슴은 음란하지 않다는 가슴 해방 운동이 거리에서 시작됐다. 탈코르셋 캠페인이다. 날씬한 몸매와 메이크업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박에, 여자처럼 꾸미되 드러내지 말라는 강요에, 섹시한 이미지를 소비하면서도 외모에 투자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남성의 이중성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섹시 이미지를 강조하는 미국 최대 란제리기업 빅토리아 시크릿은 매출이 감소했다.

팝스타 비욘세가 2014년 MTV 뮤직어워드 시상식에서 페미니스트 글귀와 함께 등장했다. (사진=비욘세 유튜브 캡처)
팝스타 비욘세가 2014년 MTV 뮤직어워드 시상식에서 페미니스트 글귀와 함께 등장했다. (사진=비욘세 유튜브 캡처)

연예계도 여풍당당이다. 이영자, 박나래, 송은이 등이 예능계의 파워가 됐다. 작년 지상파 TV의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이영자는 두 곳에서 연예대상을 받았다. 여성 수상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팝스타 비욘세가 2014년 MTV 뮤직어워드 시상식에서 현란한 페미니스트 전광판을 무대에 세우고 노래한 것은 페미니즘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10월 유방암 예방의 달을 맞아 기업들은 여성의 감성을 잡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펼쳤다. 롯데월드타워는 저녁 세 시간 동안 분홍색 조명을 밝혔고, 위메프는 유방암 환자 전용 속옷을 판매했고, CJ올리브영은 저소득층 여학생들에게 생리대를 무상 지원하는 ‘핑크박스’ 나눔 캠페인을 벌였다. 디즈니와 아마존은 최근 어린이용 완구에 ‘남아용’과 ‘여아용’이라고 구분하던 것을 ‘어린이용’으로 통일시켰다. 

롯데월드타워가 2017년 10월 핑크리본 유방암 캠페인을 지지하는 의미로 타워 전체를 핑크빛으로 밝혔다. (사진=롯데월드타워)
롯데월드타워가 2017년 10월 핑크리본 유방암 캠페인을 지지하는 의미로 타워 전체를 핑크빛으로 밝혔다. (사진=롯데월드타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장에 가고 홈쇼핑을 하고 11번가에 접속하는 수는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이다. 해외 출국자 수도 2017년 여성이 처음으로 남성을 앞질렀다. 20대 출국자는 여성이 60%를 넘었다. 2017년 남자 프로배구의 여성 관중은 68%, 프로야구는 42%였다. 야구장에는 ‘레이디스 데이’가 생겼다. 중국 알리바바 전자상거래 매출액의 70%는 여성이 차지한다. ‘쉬코노미’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소비자의 존재나 구매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크다. ‘된장녀’니 ‘김치녀’니 하는 프레임으로 여성의 소비를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기업은 이제 마케팅과 광고에서 페미니즘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른바 ‘펨버타이징’(Femvertising, Feminism+Advertising, 시리즈 1회 참고)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여성의 역할을 고정하고 왜곡하는 광고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제 소파에 누운 남편, 청소하는 아내를 보여주는 광고는 만들지 않는다. 다국적 여성용품 기업인 피앤지의 ‘소녀답게(Like a Girl)’ 광고 캠페인이나, 영국의 여성용품 회사 바디폼(Bodyform)의 빨간 피가 나오는 생리대 광고 같은 것이 광고계의 오랜 등식을 깼다.(시리즈 1, 2회 참고) 

이제 여성이 사회적·경제적 주체로 자리잡아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흐름이다. 여전히 그에 저항하는 남성들의 백래시(반발)와 젠더 혐오가 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여성의 소비에는 그 동기나 대상에 있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암묵적이든 페미니즘적 요소가 깔려 있다. 그런 분위기는 당분간 지속되며 더욱 뚜렷해질 전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제가, 기업이 페미니즘은 재화가 아닌 정신이라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은 상품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남녀가 무조건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거대한 사회변혁 캠페인이다. 페미니즘이 돈이 된다고 무리하게 마케팅에 구겨 넣는 건 협소하고 단편적인 ‘시장 페미니즘’일 뿐이다. 예민한 여성 소비자에게 언제 반격을 당할지 모른다. 여성들의 근본적 불만과 요구에 대한 이해가 늘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게 이제는 기업에 중요헌 덕목이 된 ‘젠더 감수성’이다. 일회성에 흥미 본위가 아닌, 지속적이고 차분한 친여성주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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