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회현상에는 경제문제가

아마호로 국립경기장에 모인 르완다 시민들. (사진=연합뉴스)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르완다 대학살 25주기을 맞아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국가 애도의 날’이 시작됐다.

현지시간으로 7일 폴 카가메 대통령이 2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묻힌 수도 키갈리의 대학살 기념관에 헌화한 것을 비롯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도시 등이 낭송됐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추모사도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카가메 대통령은 어두운 역사는 절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우리의 굳건한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몸과 정신은 잘려나갔고 그 상처를 견뎌야 하지만 우리는 단결이라는 실로 새로운 태피스트리(장식용 직물 작품)를 짜냈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르완다 정부 관리와 외국 사절 등 약 2000명이 참석해 르완다 의회에서부터 국립 축구경기장까지 이어지는 추모의 행진에 동참했다. 일명 ‘아마호로’ 국립 축구경기장은 당시 유엔(UN) 평화유지군이 수천 명의 투치족을 거리의 학살자로부터 지켜낸 장소다.

해마다 대학살이 시작된 4월 7일이면 대통령이 대학살 기념관에 놓은 추모 등에 불을 밝힘으로써 100일간 이어지는 국가 애도의 날의 시작을 알린다.

◆ 르완다 학살 돌아보기

르완다 학살은 1994년에 일어났다. 불과 100일 만에 약 8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으로 그규모나 잔혹성에서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인종 학살로 꼽히기도 한다. 더러는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르완다 전체 인구로는 20%에 달하는 수치다. 불과 몇 달 만에 인구의 20%가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두 민족이 어제까지만 해도 문제없이 잘 섞여 지냈다는 점에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다.

르완다는 워낙 농경 중심의 부족사회였고, 흔히 알려져 있는 후투족과 투지족 역시 식민지배 시절 행정, 정치상의 편의를 위해 임의적으로 구분해놓은 기준에 불과했다. 그 기준이래봐야 결국 재산의 유무나 콧대의 길이 정도였으니 사실상 무의미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기준점이 아무리 애매하더라도 구성원들은 결국 그 기준을 내면화하기 마련이었다. 식민시절 벨기에 지도자들이 인구에 20%에 불과한 투지족을 잘 생겼으며, 눈치가 빠르다며 차별대우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뜩이나 식민지배도 서러운데 투지족으로 인한 간접적인 차별까지 받으니 후투족으로서는 투치족이 영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직전인 1959년, 결국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다.

내전이 계속되니 경제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과거 아프리카 최대의 농경국가이자, 지금도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로 유명한 르완다이지만, 80년대 커피콩 가격 폭락까지 이어지자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후투 기득권층은 이에 빈민층으로 전락한 후투족들의 불만을 투치족들에게 돌리려는 수법을 동원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당시 후투족 촌락에는 학살 이전부터 투치족을 죽여야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하루 종일 방송되었다고 한다.

인근국가인 브룬디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다만 브룬디는 르완다에서는 약자였던 투치족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후투족이 소수에 속하는 상황이었다. 90년대 들어 브룬디의 지도부는 조심스럽게 후투족과의 유화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곧 수없이 많은 쿠데타와 암살위협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4년 4월6일 쥐베날 하뱌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부룬디 대통령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어떻게 전개되었나

양 국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한꺼번에 사망했다. 누구의 소행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2012년 프랑스에서 실시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결국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의 암살을 기점으로 사실상의 무정부상태가 전개되었다. 동시에 투치족을 향한 학살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학살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원시적인 살인 무기들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보태서 평소 쌓였던 개인감정과 분노를 학살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칼과 창, 벌채용 칼(마체테), 망치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동원되었다. 그들 중 다수는 한쪽 손에는 무기를, 다른 손에는 극단주의자들의 선동 방송을 들으려고 라디오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사건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의 한 장면. (사진=호텔르완다 영화장면 캡쳐)

이에 다수의 연구는 학살의 배경에는 인종 간 혐오(hatred)의 정서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식민지배와 오랜 내전으로 쌓여온 반감이 특정한 계기를 바탕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2016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수행한 연구도 위 논의를 뒷받침한다. 식민지배자들이 고의적으로 조장한 민족 간의 반목과 차별에 이어,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치적 갈등은 내전 및 일방적인 학살로 이어지기 쉽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흔히 피그미라고도 불리는, 소수민족인 트와족 역시 인구의 30%이상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던 것이다. 애초에 학살에 휘말린 외국인이 극히 적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민족갈등으로부터 한 발짝 비껴갔던 트와족이 왜 학살당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애초에 서로에 대한 분노로 휩싸여있던 것도 아니다. 주거지를 포함해 생활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투치족 피해자들에게 후투족 민병대는 평소 사람 좋은 동네아저씨이자, 경찰, 회사동료이자 목사님이었다. 

당시 이루어졌던 한 생존자 인터뷰는 이들의 갑작스런 집단 광기에 대한 조그마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당시 12살이었던 한 투치족 소년은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이어,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라고 전했다.

병원에서는 후투족 의사가 투치족 환자들을 죽였다. 회사와 마을에서는 살생부를 작성되어 곳곳으로 공유되었다. 성당으로 피해 들어간 사람들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카톨릭교 사제들이 사람들을 민병대에게 넘기거나 아예 자신이 직접 나서서 살육에 동참하기도 했다.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에 몸에 돌을 넣어 강에 던지기도 했다. 시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케냐의 빅토리아 호수까지 떠내려 오기도 했다. 이러한 당시의  참상을 말해 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후투족 민병대에게 칼로 난도질당하던 한 투치족 소년이 울부짖으며 “다시는 투치 안 할 게요! 살려 주세요!”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너무 어려서 투치가 뭐고 후투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도륙되었다.

◆ 모든 문제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에서

위 드러난 일화들은 내전과 학살의 원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국제관계학을 포함하여 그간의 국제학은 현상의 원인을 힘의 충돌에서 이해하려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었다. 미시적으로는 가치관 및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접근이 선호된다. 그것을 구성주의적 시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자, 사회과학에의 큰 기여는 사회현상의 원인에는 늘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르완다와 브룬디 역시 이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80년대의 작황 악화 이후 르완다의 식량사정은 명백히 악화됐다.

우리에게는 <총,균,쇠>로 잘 알려져 있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1990년 기준으로 르완다의 인구밀도는 1제곱마일 기준으로 무려 760명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밀도에 속했다. 

기계화된 영농이 가능했던 이들 국가와는 달리, 르완다는 전통적인 경작 방식에 집중했다. 인구가 여기에서 다시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전통 경작의 약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땅이 모자라자 그들은 처음에는 산을 깎고, 늪을 매웠다.

이어, 그들은 휴간기를 줄였다. 2모작은 기본이었고, 3모작도 종종 시도했다. 이에 1985년 즈음에는 국립공원을 제외한 경작 가능한 땅은 모조리 농사에 동원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인당 식량섭취량은 꾸준히 증가했으나, 커피콩 가격이 폭락하자 이들이 섭취하는 식량수준은 60년대 이전으로 회귀했다. 식민지배 시절과도 크게 다름없었다.

다이아몬드와, 그 이전 르완다 연구로 명성을 얻은 사회학자 프루니어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과거 르완다의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던 카나다의 당시 식량사정이 르완다의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프루니어에 따르면, 이 지역의 인구밀도가 1988년 제곱마일당 1740명이었으나, 1993년에는 무려 2040명까지 치솟았다. 사실상 절대다수의 국민이 농업이 종사하는 지역에서 이 사실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들에게는 ‘땅’이라는 생계수단이 소멸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위 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 농가의 평균 경작지는 1988년 1에이커를 간신히 밑도는 수준이었지만, 1993년 이 수치는 0.7에이커까지 떨어졌다. 1에이커의 경우 약 1200평이다.

르완다 농촌의 모습. (사진=르완다 농림청)

보통 한 농장이 10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0명의 농부가 각각의 구획을 맡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 농부가 약 120평의 경작지에서 대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실로 어처구니없을 만큼 적은 공간이었다. 따라서 자식세대가 새 집과 농장을 구해 새 가정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젊은이들은 결혼과 독립을 점차 미루기 시작했다. 프루니어의 1995년 연구에 의하면 결국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부모와 같이 사는 청년의 비율은 71퍼센트에서 사실상 10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나마도 잘 먹고 살았으면 모를 일인데, 사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루에 1600키로 칼로리(빈곤선을 나누는 기준)을 섭취하지 못하는 비율은 불황이 막 닥쳐올 즈음에는 9%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는 40%로 치솟았다. 학살 이전에는 훨씬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멜서스의 비극이 1994년에

더더군다나 심각한 것은 이는 단지 평균치였다는 점이다. 농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사정이 그나마 이 정도였다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물며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이들의 식량사정이야 오죽했을까.

실제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거대 농장을 갖고 있었던 이는 후투와 투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더더군다나 민병대로부터 멀리 도망칠 만큼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거나, 국경수비대에게 바칠 뇌물이 없었던 투치는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데칸대학교에서 비교적 최근인 2010년 실시한 연구도 위 논의를 뒷받침한다. 도시에서는 후투족 희생자를 온건파 후투족이라고 칭하지만, 지방에서의 학살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 간, 심지어 친족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왜냐하면 학살 뒤에는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의 분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완다 학살을 맬서스의 저주와 연결짓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초판에만 나오는 이 유명한 구절은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즉 인간은 가급적 자손을 많이 낳으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방치할 경우에는 결국엔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서 파국이 불가피하다.

맬서스는 인구가 대략 25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므로, “2세기 뒤에는 인구와 생활 물자 간의 비율이 256대 9가 되며, 3세기 뒤에는 4096대 13이 되고, 2000년 뒤의 차이는 거의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빈민의 인구 증가를 억제해 식량 생산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없을 경우, 인구감소에 대한 압력이 전쟁 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다이아몬드와 프루니어 등도 “학살도 그러한 압력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르완다의 오늘은 어떨까? 25년 전의 학살은 르완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학살을 방관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작년에는 프란시스코 교황도 학살에 동참한 카톨릭교 성직자들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르완다의 상처는 아직까지도 치료 중에 있다. 희생자의 유가족을 포함하여 7일 행사에 모인 시민들은 이 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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