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접어들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이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과거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단체 행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별로 귀를 세우지 않았고 차별의 운동장은 기울어진 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의 페미니즘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정치 경제 사회 순수문화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깃발이 펄럭인다. 페미니즘은 치열하게 거리에서 행진 중이고 금기의 언어에서 해방돼 가고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녀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 체제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의 노동과 소비, 취향과 가치관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상업화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사회적 가치와 더불어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재를 싣는다. 

피앤지의 위스퍼 광고 ‘여자답게’. “여자답게 달려봐라”는 주문에 성인 여성과 소녀는 다르게 달린다.(사진=위스퍼 유튜브 캡처)
피앤지의 위스퍼 광고 ‘여자답게’. “여자답게 달려봐라”는 주문에 성인 여성(좌)과 소녀(우)는 다르게 달린다.(사진=위스퍼 유튜브 캡처)

(#1) “여자답게 달려볼래? 여자답게 던져볼래? 여자답게 싸워볼래?” 이 주문에 성인 남녀와 남자아이들은 예외 없이 일부러 예쁘게 보이려는 자세로, 또는 한껏 움츠러들거나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달리고 던지고 싸우는 포즈를 취했다. 이번에는 열 살 안팎의 소녀들에게 같은 주문을 던졌다. 그들은 달랐다. 소년처럼 온 힘을 다해 자신 있고 씩씩하게 미션을 수행했다. 소녀에게 물었다. “여자처럼 달리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소녀는 이렇게 답했다. “최대한 빨리 달리라는 거요.” 이어 광고는 묻는다. “언제부터 여자아이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 모욕이 되었을까요?” 

여성용품 기업인 피앤지(P&G)의 생리대 브랜드 위스퍼가 2014년에 벌인 ‘여자답게(Like A Girl)’ 캠페인 광고다. 이 캠페인의 메시지는? ‘여자답게’라는 표현이 약하고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라는 편견으로 굳어져 여자 아이들이 사춘기를 거치며 자신감을 유지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성은 결국 타고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과 같다. 이 광고는 엄청난 반향을 불렀다. 지금까지 7억 건 이상 조회 수를 기록했다.  

피앤지는 이어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는 ‘We See Equal(우리는 같다)’이라는 광고를 했다. 광고에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여자 아이, 아기 기저귀를 갈고 있는 남성, 커다란 군장을 메고 집에 돌아와 딸과 입을 맞추는 여성 군인 등이 등장한다. 이어지는 내레이션. “수학 방정식은 문제 푸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Equations don’t care who solve them)”, “기저귀는 누가 갈아 주든 상관하지 않습니다(Diapers don’t care who change them)” 가정, 직장, 학교에서든 성 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깨자는 메시지다.  

(#2) 2018년 스웨덴의 여성용품 브랜드 리브레스(Libresse)의 캠페인 광고는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광고는 사회적 금기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광고의 제목부터 센세이셔널하다. ‘Viva La Vulva’다. 우리말로 하면 ‘OO 만세’다. 광고에는 여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어패류와 과일, 꽃, 모형 같은 여러 사물이 등장한다. 이것들이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자기의 그곳을 애써 들여다보는 여성도 등장한다. 광고는 무척 발랄하고 유쾌하다. 전혀 선정적이거나 외설적 느낌이 들지 않는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여성의 그 부분이 어떤 특정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불편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 아주 자연스러운 신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에 대해 수치심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말고 긍정하자는 것이다. 마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의 영상 버전 같은 느낌이다.  

면도기 질레트 광고. 성감수성에 둔감한 남성을 꼬집어 논란을 불렀다.(사진=질레트 유튜브 광고)
면도기 질레트 광고. 성감수성에 둔감한 남성을 꼬집어 논란을 불렀다.(사진=질레트 유튜브 광고)

(#3) 세계적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Gilette)가 2018년에 내놓은 ‘We believe:The Best man can be’ 광고가 미국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광고는 미투 운동을 보도하는 뉴스로 시작한다. 이어 한 코미디 쇼에 나오는 성희롱 행위를 보며 즐거워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남자 아이들끼리 싸우는 것을 바라보며 아버지들이 “사내자식이란 다 그렇지(Boys will be boys)”라며 방관하는 모습이 나온다. 

광고는 이렇게 반문한다. “이것이 한 남자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일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광고가 나간 후 남성들의 반응은 갈렸다. 남성 전체를 문제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 모욕적인 반남성 광고니 불매 운동을 펼치겠다, 미투에 편승한 상업주의 광고에 불과하다, 이런 광고에 분노하는 남성이 바로 문제라는 쪽으로 나눠졌다. 

(#4) 세계적 음료업체 슈웹스는 2018년 ‘존중의 드레스(The dress of respect)’라는 흥미로운 광고를 만들었다. 나이트클럽에 간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얼마나 자주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을 당하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준 것이다. 특별 제작한 멋진 드레스에 카메라와 센서를 부착했다. 이 드레스를 입은 여성 3명이 클럽에서 신체접촉을 당하는 장면과 어떤 부위에 집중되는지가 실시간 중계됐다. 여성 세 명은 3시간 47분 동안 157차례 신체 접촉을 당했다. 광고에 출연한 여성 모델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이 나를 만지지 말고 말로 하길 바란다. 여자에게 점잖거나 유머러스하게 존중심을 갖고 접근했으면 좋겠다.”

가수 비욘세는 2014 MTV 비디오뮤직 어워드에서 페미니즘 이벤트를 펼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사진=유튜브 캡처)
가수 비욘세는 2014 MTV 비디오뮤직 어워드에서 페미니즘 이벤트를 펼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사진=MTV 유튜브 캡처)

(#5) 2014년 8월 MTV 비디오뮤직 어워즈. 가수 비욘세가 마지막 순서로 나와 노래를 불렀다. 노래 제목은 ‘플로리스(Flawless)’. 무대에는 ‘Feminist’라는 글자가 조명으로 새겨졌다, 이 노래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합니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유명한 페미니즘 책을 쓴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강연 내용 일부를 가사로 삼았다. 비욘세는 노래 말미에 그녀가 정의한 페미니스트의 정의 -남녀가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를 그녀의 육성 그대로 삽입했다. 

이 페미니스트 퍼포먼스는 대중문화계 전반에, 유명 인사들에게 페미니즘을 상기하고 파급시키는 효과를 불렀다. 얼마 후 유엔여성친선대사인 배우 엠마 왓슨은 유엔에서 성평등에 관한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유명한 남녀 배우들이 잇따라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 파리 패션위크 2015 봄여름컬렉션의 피날레는 샤넬의 모델들이 ‘History is Her Story’ 피켓을 들고 페미니즘 행진을 하는 장면이었다. 2016년 명품 브랜드 디오르가 선보인 ‘We should all be feminists’ 슬로건 티셔츠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적인 거리 패션이 됐다.  

(#6)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 굿즈(goods)를 사고, 페미니즘 영화를 본다. 요즘 국내 출판계를 먹여 살리는 건 페미니즘 도서다. 구매자 다수는 20~30대 여성이다. 2016년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밀리언셀러가 됐다. 5, 6년 전만 해도 한 해 평균 20여 종도 출간되지 않은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한 해에 100종이 넘어섰다. 

가정 폭력의 상처를 가진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2018년 개봉 영화 ‘미쓰백’은 감독(이지원)도 여성이지만, 자칭 ‘쓰백러’라는 여성들이 단체 관람, 영혼 보내기(좌석을 예매하고 영화관에 가지는 않는 것) 운동을 펼쳐 관객 70만 명을 넘겼다. 같은 해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다룬 영화 ‘허스토리’도 여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Body Positive(몸 긍정)’ 운동이나 탈코르셋은 여성 패션계에서 뚜렷한 흐름이 됐다. 브래지어의 와이어와 패드로 인해 갑갑했던 가슴을 해방한 브라렛(bralette)의 매출은 오르고, 여성의 섹시한 이미지를 부각하던 미국 란제리 기업 ‘빅토리아 시크릿’ 매출은 크게 떨어졌다. 지나치게 깡마른 모델은 런웨이에서 퇴출되고, 건강한 느낌의 모델, 시니어 모델,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이 등장해 여성은 아름답고 날씬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있다.

이상은 불과 4, 5년 전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대중 문화적 외면을 일부 열거해본 것이다. 페미니즘은 21세기에 접어들어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지구촌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상업적 자본주의가 이런 트렌드를 놓칠 수 없다. 트렌드는 신조어를 낳는다. ‘펨버타이징(Femvertising)’이 탄생했다. 페미니즘(Feminism)과 광고(Advertising)의 합성어다. 사회 트렌드에 가장 예민한 광고가 페미니즘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제 여성의 역할을 한정한 성차별적 광고,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한 광고는 시대의 가치에 맞지 않게 됐다. 남편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아내는 청소기를 돌리는 성차별적 광고는 나오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섹슈얼리티가 광고의 요술방망이였던 시절도 저물고 있다. 전통적으로 비키니 차림의 연예인을 내세운 주류 광고 달력은 술집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는 여성을 독립적이고 주체적 이미지로 그린 광고들이 차지했다. 20, 30대 여성들이 소비의 강력한 주체로 떠오른 것도 한몫 했다. 피앤지의 ‘여자답게’ 캠페인은 펨버타이징에 불을 지핀 광고다. 당연히 다른 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야말로 기업의 매출과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요인이 됐다. 노사관계나 마케팅에서 성차별 성폭행 성희롱을 일으켰거나 여성 혐오 발언을 한 남성을 모델로 기용한 소비재 기업은 즉시 불매운동이라는 공격에 직면한다. 4년간 300억 원을 들여 2016년에 출시한 넥슨의 게임 ‘서든어택2’는 여성 캐릭터의 과도한 노출로 성 상품화 논란이 불거지며 86일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펨버타이징 마케팅은 개인의 신념적 소비로 페미니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을 겨냥한다. 소비자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행위에 동참했다는 만족감을 얻고, 기업은 그런 심리를 충족시키는 마케팅을 기획한다. 이른바 ‘착한 소비’를 유발하는 ‘코즈 마케팅(Cause Marketing)’이다. 

하지만 펨버타이징은 페미니즘과 미투에 둔감한 남성을 비판한 질레트 광고 경우에서처럼 충분히 논쟁적이다. 기업이 사회적 의제 확산을 돕는다는 긍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이런 광고가 결국은 남녀갈등을 조장하고 페미니즘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 가 크다. 페미니즘은 ‘돈’이 되니까. ‘페미코인’이란 신조어가 있다. ‘페미니즘’과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의 합성어다.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개념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분칠해 사회적 명성이나 경제적 이익을 꾀하려는 행위를 비꼬는 말이다.

어쨌든 페미니즘은 이제 금기의 영역에서 해방됐다. 요즘의 페미니즘은 심지어 가볍고 발랄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한번 물어보자.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대명제인, 남녀가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우리는 과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것인가? 여성의 삶은 달라졌는가?

도서 페미니즘을 팝니다(사진=교보문고)
도서 페미니즘을 팝니다(사진=교보문고)

작년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페미니즘을 팝니다’라는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논객인 앤디 자이슬러, 원제는 ‘We Were Feminists Once’다. 자이슬러는 1995년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명한 여성잡지 ‘비치(Bitch)’를 창간한 사람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두고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던진다.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페미니즘이 세련된 이미지로 변신하는 동안 임금 차별, 성희롱, 출산의 자유 같은 문제들도 같이 충분히 논의되었는가? 영화 속에 나오는 강한 여성들의 모습은 실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하는가? 페미니즘의 가치를 표방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성차별이 사라지고 여성의 삶이 바뀌는가?
 
그녀는 페미니즘이 요즘 핫하고 대중적 트렌드로 환호를 받지만 막상 실제로 변한 것은 별로 없다고 비판한다. 도처에 페미니즘 이벤트와 구호와 선언은 넘쳐나지만 실은 여성의 지갑을 열기 위해, 인기를 얻기 위해 페미니즘을 팔고 있을 뿐이라고 꼬집는다. 대중적 입맛에 맞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허상과 여권이 신장됐다는 착각을 심어준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를 ‘시장 페미니즘(market feminism)’ ‘달콤한 페미니즘’ ‘언론 친화적 페미니즘’ ‘연예인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페미니즘의 대중화, 상업화가 속에 우리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를 잊고 있다고 우려한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복잡하고 딱딱하며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페미니즘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상품이나 놀이나 광고가 아니다. 성평등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관철해야 할,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사회운동이며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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