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에 시민들을 찾아가 직접 고충들어
-시민들의 조코위, 시민들의 블루수깐

조코위를 이해하는 데 블루수깐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사진=자카르타 시)

불과 10여 년 만에 중앙정치의 무대로 옮겨온 조코위의 행보를 이해하는데 블루수깐(blusukan)은 필수적인 이해를 요한다. 자와어로 ‘예고없이 불쑥 방문하다’라는 의미이다. 지방 정부행정에서 조코위가 보인 파격행보로도 이해할 수 있다.

조코위는 수라카르타 시장 당시부터 불시에 시민들의 불편이 모여 있는 장소에 방문하였다. 노점상 문제를 해결할 당시에는 노점 상인들과 수없이 만났다. 1회성 방문에 그친 것도 아니었다. 노점거리를 수시로 방문하여 이해당사자와의 소통 및 설득잡업을 병행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에 따르면 “조코위는 상인들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이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자 했다”는 평이다. 그 결과 즐비한 노점거리를 구획화 하여 재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행보는 노점 상인을 만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다. 관공서, 공사장, 골목 길, 마을 주민 센터 등을 시간장소를 불문하고 방문했다. 각계각층의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고충에 대해 직접 듣고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행보였다.

시민들의 고충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블루수깐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관료사회의 긴 보고체계를 생략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조코위는 종종 시민들의 애로사항을 듣자마자 현장에서 즉시 해결책을 지시하곤 했다. 이에 시민들은 “조코위가 언제 눈앞에 방문하지는 않을까”며 그의 방문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는 정책적 성과로도 이어졌다. 그는 재임기간 중 수라카르타 낙후된 도시에서 유망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평을 얻고 있다. 그가 가진 블루수깐 카드는 자카르타 시장 재임기에도 지속되었다. 불시에 관공서에 출몰하여 민원 상담 공무원들의 에로사항과 민원인들의 요청을 동시에 들었다. 이는 특히 자카르타시에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정부패로 인한 행정서비스의 지연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했다는 평가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2014년 대선 캠페인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는 일관성있게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지역에 방문하여 각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선 캠페인에서도 조코위의 블루수깐은 여전히 큰 화제였다. 일정이 끝난 밤에 그가 머물고 있는 지역의 시장에 방문하여 시장을 돌아보고 물건을 구매하는 행보가 대표적이었다. 몰려든 인파에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는 쇼맨십이 있었다. 상인들과 소통하는 행보는 여론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17년 11월 당시 인도네시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과 거리에 나선 조코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17년 11월 당시 인도네시아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과 거리에 나선 조코위 대통령. 조코위에게 거리에 나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사진=연합뉴스)

◆ 블루수깐은 대선캠페인서도 핫 이슈

프라보워 진영에서도 어쩔수 없이 블루수깐을 시작해야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일정이 끝난 후나, 공식 일정이 없는 시간대에 주변 시장을 방문하여 상인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해보이는 활동이어도 결국 해본 사람이 잘 하는 법이다. 블루수깐이 익숙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몰려드는 인파를 대응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물건을 사는 모습도 서툴렀고, 특히 몰려드는 시민들을 응대하는 모습에서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다. 종종 전용 자가용을 타고 시장을 급히 빠져 나가는 뒷모습만 남겼다. 프라보워는 더 이상 블루수깐의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가 가진 자금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조직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으로 선거 전략을 바꿨다. 그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의견이 캠페인의 주요 전략을 떠올랐다. 말을 타고 무대에 등장하는 등 위엄을 과시하려는 행보가 이어졌다.

반면 조코위 진영은 거침없었다. 서민 출신의 대통령 후보이자, ‘나는 너희들과 같은 보통사람’ 이라는 이미지로 서민들에게 다가간다는 전략이었다. 새로운 리더십의 표본을 보여준 조코위는, 그를 둘러싼 열렬한 지지층과 함께 선거 초반 지지율 격차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블루수깐은 대선 캠페인에서 한계점이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드넓은 지역을 어떻게 다 돌아볼 것인가?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15배에 달하는 큰 국토를 보유하고 있을 뿐더러 세계 최대의 섬나라다. 많은 지역을 정해진 캠페인 기간 안에 방문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당 차원의 홍보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프라보워 후보를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는 인도네시아 운동당의 캠페인 방식과는 달리, 투쟁민주당의 전임 대선후보인 메가와티의 색채를 지우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조코위의 리더십이 (메가와티의 단점이었던) 확실한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다”며, “메가와티는 건국아버지이니 수카르노의 딸이라는 상징성이라도 있었지, 조코위는 대선주자로서의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방송매체를 통한 조코위의 선거효과도 미미한 편이었다. 보수적인 지지층을 중심으로는 ‘차라리 메가와티가 다시 나오는 것이 나을 듯’이라는 푸념까지 들어야했다. 상대진영에서 퍼뜨린 흑색 선전문구로 의심되는 ‘조코위는 메가와티의 인형이다’는 비아냥도 일상이었다.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정치기반과 자금력 자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던 조코위 진영에서는 캠페인 공세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조코위 부부는 기독교이자 화인출신이다.’ 루머가 결정적이었다. 아무리 조코위라도 SARA를 둘러싼 루머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불안 징후는 지지층의 대거이동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조코위와 프라보워. (사진=연합뉴스)

◆시민들이 블루수깐에 나서다

조코위의 지지율이 연일 하락하여 프라보워 측으로 이동했다. 선거 두 달 전인 5월에는 조코위가 52%, 프라보워가 48%로 지지율이 오차 범위 이내까지 좁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코위 지지자들은 직접 선거 캠페인에 나섰다. 

대학생 및 청년들은 Face book 과 You tube, Twitter 등을 적극 활용하여 지지를 표했다. 온라인에서 형성된 조코위 지지층은 오프라인 행사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조코위를 따라 거리에서 불시에 플레시몹 행사를 벌이는 것으로 조코위의 지지를 촉구했다.

‘플레시 몸 블루수깐’이라 불리는 이 행사는 온라인을 타고 전국 각지에 전파되었다. 행사와 더불어 조코위 굿즈, 즉 조코위 선거 캠페인 로고가 들어간 양말이나 스티커 등을 팔아 모금 행사까지 이어 나갔다.

이와 더불어 중년층 역시 이들만의 블루수깐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노점 음식중 하나인 박소를 파는 노점상들은 조코위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박소를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조코위가 박소 노점 거리를 방문했을 당시 함께 먹었던 음식이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다.

유명 연예인들의 블루수깐도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이들 역시 캠페인의 초창기에는 온라인으로 지지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두 후보의 지지율이 밀접하게 좁아지자 그들도 직접 현장에 나서 조코위의 이름을 연호했다.

인도네시아의 국민가수 중 하나인 슬랭크는 조코위를 지지하기 위해 무료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조코위의 블루수깐 정신을 이어받아 중앙 무대가 아닌 자카르타의 대형 쇼핑몰의 주차장과 같이 일반적인 장소에서 콘서트를 이어나갔다.

블루수칸에 나선 인도네시아의 밴드 슬랭크. (사진=유튜브)

스나얀 몰 주차장에서의 행사를 시작으로 그는 자카르타 지역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지역, 제2의 수도 수라바야 까지 가면서 콘서트를 확대해 나갔다. 그의 콘서트가 회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연예인, 가수, 코메디언들 역시 조코위를 지지하기위해 비슷한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대선 직전 붕 카르노 경기장에서 열린 ‘브이자로 인사해요’ 행사는 그를 지지하는 청년층, 중년층, 그리고 연예게층들이 모두 모인 결정적인 행사였다. 당시 조코위의 대통령 후보 번호는 기호 2번이었고 이에 따라 ‘브이자로 인사하는’ 캠페인이 유행하고 있었다. 

해당 행사는 당 차원에서 기획하거나, 캠프 차원에서 조코위가 시민들을 불러모은 행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행사는 시민들의 블루수깐의 완성판이다. 시민들이 모여 스스로 행사를 기획한 후 조코위를 초대하였다. ‘서민 대통령’ 이 될 것이라는 조코위 후보의 공약답게 서민들과 꾸준히 소통하려 했던 그의 행보가 본 행사에서 결실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다.

◆진정한 시민들의 승리

2014년 7월 9일, 대선 투표가 끝나자 두 후보 모두 자신의 당선을 확신했다. 선관위의 공식 집계 전 까지 각 매체 중 8개의 매체는 조코위의 승리를, 4개의 매체는 프라보워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공식집계 전까지 두 팀 모두 쉽게 축배를 들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2주 후, 선관위의 공식 집계결과가 나왔다. 조코위의 근소한 승리였다. 53,15%의 득표율을 보인 조코위가 46.85%를 차지한 프라보워를 근소한 격차로 누르고 당선을 확정지었다.

분명 힘든 선거였다. 두 후보의 득표율은 불과 6%포인트 차이였다. 전문가들은 결국 당시 대선은 시민이 승리라고 말한다. 조코위 역시 당선확정일에 “이것은 나의 승리도, 당의 승리도, 조직력의 승리도 아닌 인도네시아 민중의 승리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조코위는 애초에 수라카르타의 빈민가에서 자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 국립 가자마다 대학교의 임학과를 졸업한 뒤, 자수성가한 소도시의 가구사업가였다. 반면 프라보워는 국영은행 설립자였던 조부의 손자이자 경제부 장관을 지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예비역 육군준장 출신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선은 신정치 세력과 명문 집안 출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대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구정치 세력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새정치를 앞세운 신진 세력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그의 승리는 구정치의 산물인 카리스마적 정치, 엘리트주의가 더 이상은 인도네시아 시민에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의 실천적 증명이기도 했다. 수라카르타 시장과 자카르타 도지사를 거치면서 조코위는 항시 서민친화적인 행보로 일관했다.

인도네시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신뢰감도 결국 바로 이러한 행보에서 나온 셈이다. (계속)

글: 하영지, 인도네시아전문가

지역전문가이자 인도네시아 전문 통·번역사이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인도네시아 문민정부의 출범과 그 이후에 대해 연구 중에 있다.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인도네시아 진출에 요구되는 이문화와 어학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비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