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이야기 / 조완규 박사

[데일리비즈온 심재율 전문기자]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 원로 중에서 조완규(趙完圭) 박사만큼 다양하게 활동한 분도 많지 않을 것이다. 조 박사는 우리나라의 생물학을 개척한 과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서울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으면서 교권을 지키고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서울대학교 안에서 오랫동안 신망이 높다 보니 학장 부총장 총장을 지냈다. 정부는 조 박사를 교육부 장관으로 모셔가기도 했다. 현재 조 박사의 가장 큰 활동은 국제백신연구소(IVI, 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를 후원하고 확대하는 일이다. 매일같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있는 국제백신연구소 후원회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을 본다.

첫 번째로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

조 박사는 지난 2017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정부가 처음으로 선정한 32명의 유공자에 들어갔다.

정부는 지난 1월 23일에 2차로 과학기술 유공자를 16명(생존자 5명)을 선정함으로써 과학기술 유공자는 모두 48명(생존자 15명)으로 늘었다. 1차로 선정된 유공자 중 22명은 작고하고 현재 10명이 생존해있다. 조 박사는 동료들의 추천을 받아 유공자 회장이 되었다.

국제백신연구소에서 조완규 박사
국제백신연구소에서 조완규 박사(사진=심재율)

조 박사는 1928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벌써 92세가 되었다. 그렇지만 60~70대라고 할 만큼 건강하다. 걸을 때도 아무런 도움 없이 꼿꼿하다.

국제백신연구소는 조완규 박사가 20년 전에 유치했다. 연구소를 유치한 다음해에 바로 후원회도 조직했다. 국제백신연구소는 빌 게이츠 재단이 그동안 1억5천만 달러를 지원했다. 우리 정부도 매년 수십 억 원의 운영비를 지원한다. 저개발국 어린이 전염병 예방을 위하여 저렴한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이 연구소의 목적이다.

1990년 유엔에 모인 70개 나라 정상들이 후진국 어린이 전염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백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유엔개발기구(UNDP)가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백신연구소 설립을 권유하였다.

국제백신연구소 유치, 발전시켜

유치위원장을 맡은 조 박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유엔 창립 50주년 총회 기조연설에서 한국이 개발도상국 어린이 질병퇴치를 위하여 국제백신연구소를 설립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연구소 설립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고 국회 비준을 거쳐 1997년 세계 6개국과 세계보건기구(WHO)가 연구소 설립을 비준함으로서 국제공인기구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기구로 자리 잡았다.

조 박사는 1995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를 조직하고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회장으로, 자신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인 이희호 여사는 한국후원회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후원회 20주년 행사때 모인 후원자들
후원회 20주년 행사때 모인 후원자들(사진=조완규)

그러나 연구소는 서울대학교가 서울대 연구공원 내에 부지 5천 평을 제공하고 건물이 완공된 다음, 예정보다 5년 늦은 2003년 준공하였다. 각국 대사, 국내외 전문학자 등 200여명을 초대한 준공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연구소 건물을 국제백신연구소에 기증하고, 연구소 운영 비 일부도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연구소 연간 운영비 200억 원 가운데 정부가 70억 원을 지원하고, 부족한 재원은 후원회가 모금을 통하여 충당하고 있다.

수년 전 국제백신연구소는 후진국 어린이 콜레라 예방을 위한 값 싼 백신 개발에 성공하였다. 국내 벤처회사인 ‘유바이오로직스’가 생산한 콜레라 백신 ’유비콜’은 네팔 등 후진국 어린이에게 보급돼 생명을 구하고 있다.

국제로타리 클럽은 회원인 조 박사의 주선으로 국제백신연구소 사업을 지원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최근 ‘사랑의 백신 캠페인’을 전개한 로타리클럽은 후진국 어린이용 백신 접종에 필요한 성금을 모금하고 있다. 장티푸스 백신도 곧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소 연구원 70여 명 중 40명은 외국인 학자다. 연구소 초대 사무총장(소장)은 미국 NIH 역학부장을 역임한 미국 학자가 부임해서 12년 동안 연구소 기틀을 구축하였다. 2대 소장은 말라리아 행정 전문인 프랑스 학자가 2년 반, 그리고 현재 교포3세 과학자인 ‘제롬 김’이 3대 소장직을 맡고 있다.

국제백신연구소는 지난 20년 동안, 빌 게이츠재단이 지원한 1억 5천 만 달러로 값 싼 마시는 콜레라 백신개발에 성공하였다. 연구소는 빌 게이츠 회장의 연구소 방문을 갈망하고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백신개발은 조 박사가 전공한 생물학 및 생명과학과도 연관이 깊다. 조 박사의 부모는 의사를 권유했지만, 조 박사는 해방 직후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예과부를 거쳐 생물학과로 진학하였다.

조 박사는 화학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예과 수료생 200명 중 90명이 화학과로 쏠려 이를 포기하고 대신 지망학생이 20명인 생물학과를 택하였다.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도 화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생물학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여서 학과에 학생 실습용 현미경이 2, 3대 뿐이었다. 이렇게 생소한 생물학을 전공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이 분야 관련 국내외 연구 기관에서 봉사하고 있다.

조 박사는 열약한 환경에서 종이와 연필만으로 가능한 연구 분야, 가령 인류유전학, 인구통계학, 그리고 한국인의 출생성비 연구에 집중하였다. 연구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생쥐 안전방내에 이식한 생쥐 난자의 성숙 혹은 생쥐 배아의 분화과정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국제저명학회지에 발표하였다.

적게 먹고, 많이 걷고, 마음을 비운다

90이 넘는 고령인 조 박사에게 건강비결을 물었다. 조 박사는 건강 비결 3가지를 들었다. 우선 소식이다. 식사량이 일반 사람의 섭취량의 3분의 1정도이다.

소식의 습관은 후천적으로 길러졌다. 대학 교수로 등용된 젊었을 때 강의 준비와, 연구 활동에 몰두하는 가운데 얻은 스트레스로 발병한 십이지궤양으로 체중이 크게 줄었던 적이 있었다. 그 뒤 위에서 장으로 내려가는 유문이 좁아졌고 이로 인하여 음식 섭취량이 줄었다.

요즘도 조 박사는 아침에 우유 한 잔, 빵 한 조각으로 때우고 점심은 우유 한잔, 혹은 가끔 수프에 조그마한 빵 한 조각으로 끝낸다.

저녁 식사로는 반 공기의 밥을 국에 말아서 때운다. 하루 활동량을 비추어 볼 때 그같이 음식 섭취량이 적은 것은 조 박사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수프 한 접시에 빵 한조각인 조 박사 점심식사
수프 한 접시에 빵 한조각인 조 박사 점심식사(사진=심재율)

두 번째는 적당한 운동이다. 조 박사는 90이 넘은 오늘에도 계속 운동시설을 이용한 팔, 다리 허리 운동, 그리고 걷기운동을 한다. 이 같은 운동은 1975년부터 시작했다.

당시 시작된 민방위훈련 때 교수들이 대열을 지어 구보하였지만, 조 박사는 10m도 못가서 주저앉을 정도로 체력이 약했다. 충격 받은 조 박사는 새벽에 집 근처 삼청터널까지 오르내리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걷다가 나중에는 시내를 10km 뛰었다. 새벽 조깅을 13년 간 날씨에 관계없이 지방 혹은 외국 출장 중에도 계속하였다. 그 뒤 총장이 된 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 관악산 정상에 오르는 등산으로 바꾸었다.

의사들의 권유로 나이가 든 요새는 1만 5000보 걷기운동을 하다가 7000보로 줄였다. 조 박사는 아직도 무릎관절이나 허리가 든든하여 걷는데 굽지도 않고 지팡이도 집지 않는다.

세 번째는 마음을 비우는 일이 건강 유지의 한 근원이다. 그 동안 공사 간 여러 직책을 맡았지만 한 번도 그런 자리를 탐내거나 욕심 낸 일이 없다. 일단 일을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 봉사한다고 했다.

대학 혹은 공사기관의 중책을 맡으면서 개혁할 수 있는 용기는 바로 마음을 비운데서 가능하였다. 조 박사는 “마음 빈 생활철학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학장, 부총장 그리고 총장과 교육부장관 등 각종 공직을 수행하면서도 별 잡음이나 갈등 없이 후배로부터 존경받는 비결이 마음 비우고 욕심이 없는 조 박사의 천성이 근원이라 하겠다.

총장 시절에도 실험실 드나들어

1967년 이학부 교수인 조 박사가 문리과대학 학생과장에 임명되었다. 관례로 문학부 교수가 맡아 온 보직이었다. 당시 군사정부 반대, 민주화쟁취 등 구호를 내 걸고 영일 없이 벌이는 학생시위로 학내가 어수선하였다.

조 박사는 학생과장 직을 수행한 2년 동안 시위 주동자라며 수배된 학생을 숨기거나 집에서 재워주는 등 학생보호에 힘썼다. 대학생의 정부 비판은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의례히 몇 개월 하다 그만두던 학생과장 직을 조 박사는 교수, 학생의 신임 속에 2년을 채웠다.

조 박사는 1974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이학부장의 보직을 맡았었고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겨가면서 문리과 대학이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세 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초대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학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최초로 30여명의 교수를 공채함으로서 서울대학교 전체가, 그리고 끝내는 전국 대학이 교수 공채의 새로운 제도를 택하도록 하였다.

또한 자연과학대학 교수 연구비를 중앙 관리하는 제도를 택함으로서 결국 전국 대학의 연구비 중앙관리제도를 확립하도록 하였다.

조 박사는 1974년 이학부장일 때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5백만 달러의 AID 차관금을 획득하여 5개 년 계획으로 교수 유학 및 연구용 기자재 구입 등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 사업을 주관하였다. 조 박사는 “교수 재임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 하였다.

조 박사는 학장 혹은 총장직에 있으면서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보직 재임기간에도 17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결국 1992년 113번째 논문을 끝으로 연구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원래 서울대학교 부총장직은 교수 겸직을 할 수 없는 본직이었다. 1979년 부총장으로 임명된 조 박사가 부총장도 학장과 같이 교수로 보하도록 정부에 요청하면서, 정부는 교육법을 개정하여 조 박사 뒤의 부총장은 교수보직으로 바뀌었다.

부총장이나 총장을 마친 다음에도 교수로 돌아올 수 있는 전통이 마련된 것이다. 조 박사는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 후 학칙에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 징계권을 총장에서 교수 회의로 이관하는 학칙을 개정하였다.

백신연구소는 저개발국가의 어린이 백신을 연구한다.
백신연구소는 저개발국가의 어린이 백신을 연구한다.(사진=심재율)

정부는 2개월이 지나도 새 학칙을 승인하지 않았다. 개정학칙이 반환될 경우 총장직을 사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교부 서명원 장관이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교수가 제정한 자율학칙이라며 이를 승인하고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개정된 이 학칙은 서울대학교 안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칙 개정은 바로 조 박사의 마음 빈 철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율적인 학칙개정으로 대학 안정에 기여

그런데 1988년 8월, 조 박사가 호주 출장 중, 농민의식교육이 주된 목적인 ‘농촌봉사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학교 측이 지원하지 않는다며 학생회 간부들이 총장실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수는 등 지성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에서는 따로 예산이 없으니 매년 그랬듯이 학생회비로 충당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불복한 학생회 간부들이 총장실에 난입하여 기물을 부순 것이다.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교수들은 교수회의를 개최하여 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간부 11명을 제명, 11명을 무기정학의 중징계처분을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총장인 조 박사는 서울대학교 초유의 학생난동이라서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고 정부에 총장직 사표를 냈었다. 이에 관한 일은 여러 날 동안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정부가 사표를 반려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총장직을 계속 수행 하였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했다.

조 박사의 맏아들은 연세대 생물학과 조진원 교수로 대학생 때 밴드 ‘라이너스’를 조직하여  ‘동네 꼬마 녀석들~’이라는 ‘연’ 노래로 대학 캠퍼스에 이름을 떨쳤다.

과학기술유공자 증서 ⓒ 조완규
과학기술유공자 증서(사진=조완규)

조 박사는 우리나라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8년 째 에쓰-오일 과학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우수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하면서 이 같은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젊은 과학자들의 논문의 수준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조 박사는 “창의성 있는 연구로 과학발전에 기여한 과학자에게 노벨과학상을 수여하지만 10년 혹은 20년간의 평가를 거친다. 오늘날의 우리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도 매우 창의성 있고 수준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장차 노벨상을 꿈 꿔 볼 만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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