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카스트로 이어 디아스카넬 집권
-새로운 개헌안에 시장경제 도입 포함
-24일 표결...국민투표 통과 가능성 높아

겔 디아스카넬 신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가운데)이 지난 7월 17일 아바나에서 열린 상파울루 포럼 폐막식장에서 전임자인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제1서기(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데일리비즈온 박상희 기자] 사회주의 나라 쿠바에서 자유시장과 사유재산권을 공식 인정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개헌이 통과를 목전에 두고 있다.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76년 이후 42년 만의 사건이다. 포스트 혁명 세대의 시작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그의 나이 80살이던 2006년 7월31일의 일이다. 그의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가 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8년 2월 24일 의장직을 공식 승계한 뒤 약 10년간 일했다.

5년 임기를 두 차례 채운 그는, 지난 4월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을 남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1년 자신이 만든 임기 제한 규정 때문이다. 

◆ 포스트혁명 세대의 집권

라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디아스카넬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은 1960년 4월20일 중부 비야클라라주의 플라세타스에서 태어났다. 쿠바 혁명 1년4개월여 뒤다. 그의 집권은 ‘혁명 이후 세대’가 쿠바 국정을 책임지게 됐음을 뜻한다.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의 봉쇄정책 속에 쿠바는 소련의 지원 속에 경제를 유지했다. 소련은 국제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쿠바산 사탕수수를 수입했고, 국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원유를 수출했다. 소비에트 붕괴 직후 쿠바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처럼 쿠바에서도 1990년대를 ‘특별시기’로 부른다. 하지만 쿠바에선 북한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맞이하지 않았다.쿠바에서도 ‘식량 위기’가 닥쳤지만, 당국이 유연하게 대처해 어려움을 넘겼다는 평이다.

방식은 두 가지였다. 소련의 원유 공급에 힘입어 당시 쿠바 농업은 고도로 기계화된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원유 공급 중단은 농업 생산에 치명적 타격이 됐다. 그나마 농촌에선 굶주림이 없었지만, 도시에선 끼니 걱정까지 해야 했다. 

이 무렵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민이 농촌으로 갈 수 없다면, 농촌을 도시로 가져오자.” 이제는 전설이 된 ‘쿠바 도시유기농(오르가노포니코)’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골목마다 작물이 자라났다. 채식 위주의 식단일망정 먹을거리 걱정은 사라졌다.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하고도 남게 됐을 때, 두 번째 개혁 조치가 이어졌다. 북한의 ‘장마당’처럼 쿠바에서도 동네마다 농산물 판매를 위한 소규모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을 사고팔며, 적은 금액이나마 ‘이윤’이 생겼다. 작지만, 크고 분명한 변화였다. 

◆ 변화의 부침을 거듭하는 쿠바 

당시 디아스카넬은 막 비야클라라주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됐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지역을 돌며 주민과 소통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으로 갈음했다. 라울은 디아스카넬의 이 점이 맘에 들었다. 디아스카넬을 2009년 교육부 장관에 발탁한 것도 라울이었다. 그는 2013년엔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으로 지명됐다. 

새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한 개헌위원회는 라울이 직접 이끌었다. 디아스카넬은 위원으로 참여했다. 라울은 2021년까지 공산당 제1서기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공산당 제1서기와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시에 맡지 않는 것도 디아스카넬이 처음이다. 

디아스카넬은 실제로 로큰롤 음악을 즐겨 듣고 동성애자 권리 옹호 활동에 참여하는 등 기존 지도부보다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여러 매체들은 그의 고향, 산타클라라 사람들은 그를 비틀스 음악을 즐겨듣는 장발의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후술할 개헌안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울러 그의 집권은 쿠바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방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역시 88년 만인 2016년, 쿠바를 전격 방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디아스카넬이 돌파해야 할 과제는 만만찮다. 우방국이자 원유 공급처였던 베네수엘라 경제난의 직격탄을 맞아 쿠바의 경제 상황도 바닥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 침체기를 맞으며 식품의 60~70%가 수입으로 충당되고 있으며, 지난해 설탕 수확량은 30% 하락해 지난 10년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에 지난해 경제 성장률은 1.6%에 그쳤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과의 경색된 관계도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와의 교역과 여행 제한 조처를 명령했고, 쿠바 주재 미국 외교관 일부가 ‘괴증상’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미국 주재 쿠바 외교관을 추방했다.

쿠바의 수도 하바나의 거리. (사진=블룸버그)

그렇기에, 새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기대감은 다소 적은 편이다. 로이터의 인터뷰에 따르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야당에 기회를 주고 더 자유로운 선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리처드 페인버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시 “디아스카넬은 모든 면에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쿠바인들, 특히 젊은층은 시장개방과 속도를 내길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서는 구질서를 새로운 제도로 대체할 개헌이 필요하다.

◆ 변화의 바람 반영된 개헌안

이에 지난해 7월, 쿠바 의회인 전국인민권력회는 21일 사유재산 인정 및 시장경제 도입, 국가평의회 의장 임기 제한(10년), 총리직 신설, 동성결혼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전격 가결했다. 

특히 쿠바 안팎에서는 이번 헌법 개정안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기존 헌법에 명시돼 있던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란 구절이 생략되고 개인 재산을 인정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쿠바에서는 사유재산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외국 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대거 인정한 점도 눈에 띄었다. 기존 헌법에서는 국가와 협동조합, 합작투자 자산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개헌안에 따라 미국 등 외국 기업들도 쿠바 내 합작회사 설립 없이도 기업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바뀌었다. 기업에 대한 투자가 완화돼 외국 기업뿐 아니라 소규모 기업들의 활동도 법으로 보장받게 됐다. 

해외 언론을 이룰 두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당시 “사유재산과 외국인 투자는 이미 쿠바에서 공공연한 것이지만 개헌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며 “표면적으로 자본주의를 악으로 규정했던 데서 벗어나 중대 변화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기존 국가평의회 의장이 독점하던 권력도 이원화시켰다. 내각에 대한 권한을 국가평의회 의장과 총리가 분점하도록 했다. 대통령 임기 또한 5년 중임으로 제한했다. 또한,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 원칙을 강조하며 사회적으로 금기시됐던 동성 간 결혼 허용을 허용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사진=연합뉴스) 

◆ 개헌안 통과 가능성은 높아

개헌안 표결일시는 오는 24일로 예정되어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각국 외신과 쿠바의 공산당 기관지 그린마는 쿠바 헌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의 결과를 예상하는 추측성 보도가 연일 내놓고 있다.

한 쿠바 전문가는 이번 개헌안에 대한 반대 투표율이 25%에 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현행 헌법은 1976년 560만 명의 등록 유권자 중 97.7%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당시 5만4000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번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는 800만 명으로 예상된다.

개혁성향의 문화 잡지인 테마스의 편집자이자 쿠바 정치 분석가인 라파엘 에르난데스 역시 “이번 개헌 투표에서는 유권자의 75%가량이 찬성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쿠바 정부 역시 최종안 가결 이후 찬성을 애국적인 행위로 묘사하는 등 각종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디아스카넬 역시 트위터에서 “최종안은 주권, 독립, 쿠바 남녀의 위엄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종 개헌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공산당 통치를 종식하기 위한 진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이번 개헌이 개혁, 개방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공산당 주도의 통제 사회로부터의 전환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라파엘 에르난데스 역시 “우리는 다른 국가에서 찬성률이 65%를 넘으면 엄청난 득표로 간주하지만 쿠바에서 찬성률이 98%를 넘지 않으면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개헌안이야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만,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남아있다는 메시지다. 쿠바의 또 다른 혁명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비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