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은 1993년 요세미티국립공원에서 915미터인 엘캐피탄의 노즈 루트를 인공등반 장비 없이 자유등반으로 해냈다.

■린 힐ㅣ출판년도 2003년ㅣ쪽수 288쪽ㅣ출판사 W.W 노튼앤 컴퍼니
■린 힐ㅣ출판년도 2003년ㅣ쪽수 288쪽ㅣ출판사 W.W 노튼앤 컴퍼니

등반의 세계는 늘 진화하고 발전해왔는데 전통적으로 거벽등반은 대개의 경우 인공등반 기술에 의존했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등반에 대한 가치와 관심들이 고조되었다. 작고 좁은 홀드와 크랙에서 좀 더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등반대상지를 찾았던 등반세계는, 1년 내내 훈련과 등반에만 몰두하는 마니아 성향의 엘리트 클라이머들이 나타나면서 그 문제를 풀었다.

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은 10대 때부터 요세미티의 여러 암장에서 등반을 해왔고 전 세계로 등반여행을 돌면서 끼 있는 말괄량이에서 고상한 월드챔피언으로 성장해 나갔다. 키가 크지 않고 몸무게도 적었지만 등반 중에는 강한 체력과 근력 이외에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종종 증명해 보였다.

물론 그녀에게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길러진 강철 같은 막강한 손가락 힘이 있었는데, 여기까지는 많은 다른 등반가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진정 특별한 등반의 성취를 획득할 수 있는 관건은, 등반상황을 영상화시킬 수 있는 상상력과 순간적으로 과감하고 창의적인 결단을 보일 수 있는 정신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소수의 등반가에게만 허락되었다.

1993년, 요세미티국립공원에서 린은 아직까지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벽 길이만 915미터인 엘 캐피탄의 노즈 루트를 인공등반 장비 없이 자유등반으로 해내는 것이다. 영국인 클라이머 사이먼 나딘이 동행했다. 두 사람은 이 루트의 전설적이고 상징적인 시클 레지와 스토브레그 크랙, 돌트타워를 무난하게 통과했다.

그 위부터 부트 플레이크가 시작된다. 이곳은 수백 톤의 화강암덩어리로 중간에 확보와 지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구간이다.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는 공백지대를 왼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워렌 하딩팀은 굉장한 거리의 펜둘럼을 시도했었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킹스윙을 대부분의 등반가는 펜둘럼으로 넘어갔지만 자유등반에서는 인정하지 않은 인공등반 기술이다.

레이 자딘이 이 킹스윙을 거치지 않고 부트 플레이크를 우회해서 올라가는 변형 루트를 찾아냈다. 그것은 올라갈 수단이 없을 것 같았던 화강암의 공백지대에서 미세한 바위의 주름선을 따라 올라가는 루트였다.

5.12a 정도의 난이도로 평가되는 이 루트가 린과 레이에게 닥친 첫 번째 기술적 장애물이었다. 최고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이곳을 넘어가니 세모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거대한 오버행이 나타났다. 창백하게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가 특징인 ‘대천정 오버행’은 노즈 루트의 하이라이트였다.

610미터 아래에 있는 초원에서 관광객들이 노즈 루트를 다른 루트와 구별해서 알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바로 이 대천정이다. 1993년 전까지는 이 구간의 초입 부분을 자유등반으로 올랐었다. 그러나 천정의 그늘지고 휘어진 부분으로 접어들면 피톤과 줄사다리를 쓰지 않을 수 없고 곧바로 인공등반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린은 몇 차례의 짧은 추락으로 힘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도와 추락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육체적인 피로도가 극복할 수 있는 극한의 한계까지 가야만 이 작업이 끝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때의 심정을 “나는 미들 캐시드럴 록 계곡을 건너다보면서 그림자의 움직임이 내 마음의 형태를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위에 비쳐진 내 마음의 모습은 언제나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었는가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이번 등반이 내 운명의 일부가 될 것이고 신비스런 힘의 원천이 될 거라고 믿게 되었다. 내가 힘이 다 빠져 펌핑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용감하게 추락할 것이고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다”라고 술회했다.

레이는 오른쪽으로 시도하는 그녀를 위해 로프를 슬슬 풀어 주었다. 그녀가 대천정 뒤쪽으로 가느다란 크랙에 작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몸을 이동시켰다. 반반한 수직의 벽에서 암벽화로 미세한 홀드를 찾아 조금씩 발을 옮겼다. 몇 번 미끄러졌지만 손가락으로 바위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겨우 대천정 위로 올라섰다.

다음날 등반을 계속하는데 정상 부근에서 그녀를 당황하게 만드는 구간이 나타났다. 지상에서 915미터 되는 지점에 크럭스인 ‘체인징 코너’를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팔이 짧아서 크랙등반이 어려울 거라고 걱정했지만 각각의 동작을 모아 조합을 시도했고, 마침내 미친 듯한 춤동작으로 크럭스를 돌파했다. 그 난제를 풀기 위해 거친 탱고 리듬의 스미어링과 서투른 스테밍, 크로스스텝 등 스포츠클라이밍의 모든 동작과 기술을 동원했다.

이 등반을 마치고 얼마 후 린이 요세미티계곡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전 루트를 자유등반으로만 연속해서 단 한 번에 완등 했다. 나흘이 걸렸는데 환상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에게는 무언가 부족했다. 다음해에 그녀는 이 벽의 크럭스인 상부 1/3지점을 포함한 33피치를 자유등반으로 하루에 완등 한다는 목표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마라톤레이스였다. 린은 이 목표를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을 거듭했고 1994년 9월 19일 밤 10시, 스티브 셔튼과 함께 달빛을 받으며 역사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놀랄 만한 속도로 등반이 진행되어 오전 8시 30분에 대천정에 도착했다. 대천정은 여전히 도도하고 냉정하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단 한 번의 시도로 가볍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녀를 실망시킨 것은 체인징 코너에서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세 번이나 추락하는 바람에 힘이 다 빠지고 무기력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낙담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를 한 번 바꿔 보자고 심기일전했다. 그녀는 잠시 쉬면서 계곡 건너편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저녁이 다가왔고 또다시 미들 캐시드럴 록에 마음의 그림자가 비쳤다. 신비스럽게도 이 형상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의 원천이 되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시 등반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지독하게 복잡한 여러 연결 동작들이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추락을 면했고, 이후 세 개의 피치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리고 자신에 찬 페이스를 리드미컬하게 유지했다. 밤 9시, 그녀는 워렌 하딩의 마지막 오버행볼트래더를 자유등반으로 제치며 23시간 만에 당당한 모습을 정상에 드러냈다.

■ 글 |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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