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헤밍은 “단독등반은 러시안룰렛 게임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왔지만 그 어떤 미국의 등반가도 그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 미렐라 텐더리니ㅣ출판년도 1995년ㅣ쪽수 190쪽ㅣ출판사 어네스트 프레스
■ 미렐라 텐더리니ㅣ출판년도 1995년ㅣ쪽수 190쪽ㅣ출판사 어네스트 프레스

1966년 8월 13일, 휴가를 이용해 알프스의 쁘티드루 서벽을 오르던 두 명의 독일 등반가가 조난을 당했다. 18일에 대대적인 구조대가 조직되어 구조캠프를 설치했다. 구조대는 쉬운 루트로 정상에 오른 후 하강하여 조난위치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폭설과 강풍이 이들을 정상에 묶어두었다. 다른 네 명의 구조팀은 서벽을 가로질러 북서릉으로 접근했다. 이 루트 역시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어 바위의 홀드가 코팅된 듯 반질했고 크랙에 피톤을 설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게리 헤밍은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쪽 몽블랑을 등반하기 위해 이동 중에 이 조난소식을 접했다. 그는 1962년에 요세미티 등반의 전설인 로열 로빈스와 함께 이 쁘티드루 서벽에 아메리칸다이렉트 루트를 개척한바 있어서 누구보다 이 벽에 정통했다. 그는 만류하는 친구들을 설득했다.

“지금 저 서벽에 고립무원인 두 명의 독일인이 절박한 상태다. 나는 그 루트에 경험 있는 등반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등반가는 언제든지 구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은 가이드나 군인만의 몫이 아니다. 에뀌누와르 남벽보다 더 어려운 등반이고 진정한 모험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두 명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이고 시간이 없다는 거다.”

샤모니에 도착한 게리는 8명의 정예 구조대를 2개 조로 편성하여 1조는 등반로를 개척하고 2조는 식량과 장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다른 구조팀들이 장비의 부족과 부상으로 속속 실패를 거듭한 가운데 게리는 조난지점에 근접했다. 7일째 추위와 배고픔으로 탈진상태인 조난자들이 생존해 있음을 확인했고, 이 구조 장면은 프랑스의 전 언론매체에 대대적으로 생중계되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구조작업에 헌신적이었지만 오직 게리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를 만나 보기 위해 샤모니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후 매년 여름 샤모니에는 이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로 회자되었고, 이때의 구조작업은 몽블랑 산군에서 가장 어렵고 위험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사실 그때까지 게리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요세미티 황금기인 1950년대 말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많은 등반활동을 했고, 조수아트리와 타퀴즈 암장에서 암벽등반의 열정을 키웠으며 요세미티의 600미터 수직벽인 하프돔 북서벽을 개척했다.

이 등반을 위해 그는 몇 달간 드릴링을 위한 탄소심과 마터호른 북벽 초등 시 슈미트 형제가 고안한 해먹을 연구했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산군의 많은 무명봉을 개척했다. 그는 1960년, 새로운 등반세계를 찾아 알프스에 왔고 1962년에 로열과 함께 미국인 최초로 그랑조라스 워커스푸르를 등정했다.

같은 해 몽블랑 지역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아름답다는 드루 서벽에 아메리칸다이렉트를 개척했는데, 이 루트는 3일간의 등반으로 열린 초등 루트로 러프와 같은 진보된 피톤과 장비, 그리고 요세미티 등반방식을 적용하여 직등 루트를 가능케 했다.

게리는 이 등반들을 통해 로열의 등반에 대한 철학과 비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신이 어떤 루트를 오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루트를 어떤 방식으로 오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인공등반 장비는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을 때 최후의 선택사항이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공장비를 설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자유등반의 가치를 인식시켰다.

이러한 생각은 알프스의 주요 루트가 모두 등정된 1960년대 당시, 이미 진부하고 고전적인 알피니즘에 속했는데, 그는 존 할린과 함께 당시 신기원적인 에뀌뒤푸 남벽을 초등했다. 게리가 알프스에서 성취한 이런 경이로운 등반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등반을 모험의 또 다른 대상으로 여겼고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등반 원칙이 되었는데, 나중에 오르는 사람 역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회를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어려운 루트를 개척했지만 누구에게도 그 루트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등반 중에 설치했던 피톤과 슬링 역시 모두 제거했다. 가스통 레뷔파 등이 알프스에서 많은 루트를 개척할 시기에도 게리는 단독으로 로프 없이 자유등반을 했고 루트 개념도조차 남기지 않았다.

단독등반은 어렵고도 위험한 행위다. 러시안룰렛 게임과 같은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위에 서있었다. 그와 함께 알프스에서 등반을 한 톰 프로스트는 “그의 등반 스타일은 거침없고 완벽했으며 파트너에게 심리적인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다”고 기억했다. 게리는 월터 보나티의 모험과 도전을 존경했다.

그 또한 등반가라기보다 모험가로서의 등반을 추구했다. 게리는 프랑스에서 영웅이었지만 미국에서는 그의 알프스에서의 모험적인 활동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알프스에 순수한 등반방식을 도입하여 거벽시대를 개척한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알프스의 이방인이었던 게리의 사생활은 고독과 절망으로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복잡한 여성편력과 약물복용, 그리고 시대의 혼란한 상황은 그를 저항과 심리적 반목으로 몰아갔다. 그가 쁘티드루 서벽에서의 구조 활동 이후 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했지만 자신의 과거나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에는 매우 민감했고 나이조차 밝히기를 꺼려했다.

호기심 차원에서 그의 영혼에 접근하려는 그 어떤 의도들에도 그는 강하게 거부했다. 어린 시절, 명석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게리는 성장하면서 대화의 상대가 사라졌고, 그는 생각을 글로 남기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항상 긴 머리에 붉은색 점퍼, 헤지고 색 바랜 청바지, 그리고 스카프는 그의 저항적인 내면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와 베트남전 참전 등에 대해 그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국가체제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일반시민들의 삶의 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자유연애와 약물복용은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재혼 후 대학에 진학해서 열정적으로 학업에 전념했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부족했고 박사학위를 위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훈련을 받았고 강인한 체력과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 용기와 애국심까지 경험했다. 하지만 사관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질서는 그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몰아갔고, 미국의 정치현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1960년대 프랑스의 자유스런 이미지가 그를 새로운 세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1960년, 그는 작가와 알피니스트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프랑스 그레노블에 왔다. <캘리포니아에서의 등반>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당시 신세대의 등산철학과 사상이 함축된 글도 발표했지만 작가로서의 길은 그에게 좌절만을 주었다.

그는 좀 더 완성도 높은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린 친구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나약해져 있었고 패기는 사라졌다.

그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커다란 탈출구를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마음의 평정을 갖기 위해 모색을 했지만 제대로 균형 있게 찾은 대상은 클라이밍뿐이었다. 어디를 가든 많은 양의 글을 썼지만 거듭된 좌절과 자포자기로 갈등과 긴장을 유발했고 착각과 환상이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정신분열적인 심리상태와 성격, 그리고 내면의 세계에만 깊이 빠져있었던 그의 글에는 자살과 관련한 문구들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실패에 대한 마지막 보상은 아름다운 죽음(자살)이라 했고, 영웅의 죽음은 자신의 죄를 옹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리는 자신이 영웅이기 때문에 일찍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로열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했다. “그는 강인한 생명력과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의 생명을 앗아갔고 우리에게도 많은 부분을 앗아간 그에게 오히려 분노가 치민다.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한 그의 폭발적인 열정은 우리에게 존경스러움과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왔지만 그 어떤 미국의 등반가도 그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 글 |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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