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맘때쯤이면 늘 대형 서점이나 문방구에 가서 두어 시간을 보낸다.

책을 사려는 게 아니다. 새해 다이어리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내 딴에는 소소하고 행복한 연례행사다. 어떤 멋진 디자인 제품이 선을 보였을까, 내가 애용해온 다이어리는 이번에는 어떤 모양으로 나왔을까. 샘플을 요모조모 뜯어본다. 가격과 전반적 품질, 색깔, 커버의 재질, 속지의 배열, 종이의 촉각까지 살펴본다. 온라인쇼핑몰에서 다이어리나 플래너, 수첩 검색도 해본다. 이른바 문구덕후로 알려진 사람들의 블로그도 가본다.

나는 수십 년 다이어리 애용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그 불편함의 여유가 좋다. 아니 즐긴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휴대폰 앱을 쓰면 편리한 점이 많다. 언제든 어디서든 손쉽게 기록할 수 있다. 캘린더앱에 일정도 바로바로 적어놓을 수 있고, 다이어리앱이나 메모앱에 얼마든지 생각을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종이 다이어리를 갖고 다니려면 꼭 가방이 있어야 하고 뭘 쓰려면 어딘가에 정좌해야 한다. 필통과 다이어리를 주섬주섬 꺼내야 한다. 

이 불편함이 의외로 나를 평온하고 침착하고 여유 있게 만든다. 오랜 친구처럼 곁에 둔 파버카스텔 연필로 대문호들이 사랑한 몰스킨 다이어리에 글이나 글자를 쓰면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든다. 사각사각 질 좋은 빈 종이를 채워가는 행위에서 오는 충만감이 나를 감싼다.

커피 체인점들이 경쟁적으로 내놓은 2019년 다이어리. 이걸 받으려면 커피를 최소 열 잔 이상 마셔야 한다.
커피 체인점들이 경쟁적으로 내놓은 2019년 다이어리. 이걸 받으려면 커피를 최소 열 잔 이상 마셔야 한다.

그건 휴대폰앱에 손가락으로 자판을 치는 터치감하곤 격이 다르다. 정형화한 글꼴에 동일한 글자 크기가 이어질 때는 창조적 생각이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지만, 수기를 할 때는 마음껏 변화를 주고 장난을 칠 수 있어 뇌세포가 활발해진다. 빈 페이지를 무언가로 채워 디자인하는 느낌, 나만의 암호나 약자를 군데군데 쓰면서 쭉쭉 밑줄이나 화살표를 긋거나 동그라미를 치는 재미도 좋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진심과 성의가 느껴진다. 나중에 기억도 잘 난다. 중요한 차이는 손으로 종이에 쓸 때는 일상과 일과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끔씩 엄습하는 삶과 일의 무의미가 줄어든다. 잊었던 것,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과 만날 때, 회의나 미팅을 할 때 상대방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내놓으면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더 성의 있게 대화하게 된다. 스마트폰 액정화면에 내 말을 메모하는 사람은 왠지 진심이 안 느껴진다.

인스타그램에 ‘#다이어리 꾸미기’를 검색하면 20만 개가 넘는 포스팅이 있다.
인스타그램에 ‘#다이어리 꾸미기’를 검색하면 20만 개가 넘는 포스팅이 있다.

다이어리는 역설적으로 소통이 없어서 자유롭다. 인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이 아날로그적 공간은 스마트폰이 지원하는 검색과 공유 교정 배열 분류 사진첨부 파일저장 같은 기능은 원천적으로 없지만 디지털의 위력에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 고고함이 있다. 공감도 소통도 없는 꽉 막힌 나만의 공간이어서 좋다. 내 다이어리의 독자는 나뿐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다이어리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다.

나도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소셜을 하지만 그건 공적 행위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쓰는 홍보와 사교의 장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면 반응에도 예민해진다. 다이어리는 다른 차원이다. 그건 나 자신과의 소통이자 힐링의 공간이다. 내 자신에게 더 내밀해지고 솔직해질 수 있다. 누굴 욕하는 글을 적어놓을 수도 있고 내 감정을 배설할 수도 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송년회를 갖고 다음 모임의 날짜를 잡을 때 모두가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열었다. 한 친구만이 일 년을 다 써서 낡은 작은 수첩을 안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너는 아직도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했냐고 친구들이 핀잔했다. 그 친구는 말했다. “휴대폰에 적어놓으면 자꾸 까먹게 되더라. 어쩌겠냐. 평생을 수첩에 적고 다녔는걸.” 난 그 친구가 새롭게 보였다.

대중교통 수단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치고 연필로 쓰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 저 사람은 무얼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TV나 동영상을 보거나 연재 웹툰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 그만이 지하철 안에서의 유일한 크리에이터다.

종이 노트는 전원도, 부팅도 필요 없고 동기화도 없다. 그래서 ‘쿨’하다. 양초나 LP판이나 필름카메라나 자전거가 기술적으로는 한물 간 사물임에도 쿨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종이와 펜은 만져지고 느껴진다. 바스락바스락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손가락에 전해지는 종이의 매끈한 때론 투박한 촉감.

감각은 오감으로 확장된다. 마치 턴테이블의 바늘이 반짝반짝 빛나는 레코드판에 살짝 내려앉으며 잠시 지지직거리다 음악이 재생되는 순간처럼 희열이 밀려온다. 터치스크린이나 모니터 화면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전자책이 나올 때 종이책 시장은 금세 무너질 거라고 사람들은 예견했다. 종이신문도 곧 사라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전자책은 서점을 이기지 못했다. 경험을 통해 길들인 가치는 질기다. 백열전구가 발명된 지 백년이 넘었어도 양초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종이 다이어리나 수첩은 사전과 CD플레이어와 함께 마땅히 사라졌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은 스타벅스 다이어리 한 권을 받기 위해 기꺼이 열일곱 잔의 커피를 마신다. 그래도 품절이다.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다이어리’를 검색하면 63만 장의 사진이, ‘다이어리 꾸미기’는 23만 장이,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9만 5천 장의 사진이 뜬다. 

몰스킨, 프랭클린, 쿼바디스, 파일로팩스, 5년 후 나에게 Q&A a Day, 오롬, 윈키아, mmmg, 오브젝트, 양지…. 당신이 이 글에 공감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중 한 개는 당신의 다이어리일 것이다.

황금개띠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황금돼지해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무슨 글을 써넣지? 나는 벌써부터 설렌다.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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