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거' 이미지 아직도 좋지 않아...결혼의 사전 단계가 아니라 대안으로 생각하는 커플이 다수
- 프랑스 시민연대협약(PACs, 팍스) 제도...출산율 증가 시켜
- 비혼이 하나의 선택지로 자리 잡아

'동거(同居)'란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태생적으로 불온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동거를 찾았다. 1.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삶 2.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 동거는 '같을 동' '살 거'일 뿐인데, 왜 부부가 아닌 남녀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회적 의미가 붙어버렸을까.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같이 살 도덕적 자격이 없으니까. 그냥 동거라고 불릴 뿐이다.

동거란 단어는 음습하다. 내연남, 내연녀가 연상된다. 뉴스에 등장하는 동거는 주로 범죄와 관련이 많다. '동거녀 결별 요구에…범인은 동거남' 이런 식이다. '남자들이 가장 꺼리는 연인의 과거 1위는 동거', '양다리보다 동거 경험이 싫어'라는 조사 결과도 많다. 동거는 비정상적인 것, 떳떳하지 못한 것, 성적으로 문란한 것이라는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7년 동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다. 88.6%나 되는 사람들이 '(매우 또는 어느 정도) 호의적이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통계청이 11월 6일 '2018 사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만 13세 이상 3만 9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2년마다 하는 조사다. 언론이 크게 다뤘다. 기사 제목과 첫 문장은 대동소이했다. "결혼은 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 이하인 48.1%로 떨어졌다는 걸 가장 먼저 부각했다. 그리고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서 56.4%였다는 점을 대비시켰다. 결혼과 동거에 대한 생각이 처음 역전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6년 조사에서는 각각 51.9%, 4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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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11월 6일 발표한 '2018 사회조사 결과'. 결혼과 동거에 대한 생각이 처음으로 역전됐다. (자료=통계청)

결혼 적령기에 있는 이들의 대답만을 보자. "결혼은 해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20대에서 33.5%로 가장 낮았다. 이어 30대(36.2%)의 순이었다. 20~30대 세 명 중 한 명만이 결혼을 꼭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동거에 대해서도 그렇다. 20대는 무려 74.4%가 괜찮다고 답했다.

자, 이 파라독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국민의 절반 이상이, 20대에서는 무려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동거가 현실세계에서는 왜 여전히 불온하고 음습한가. 양지로 나오지 못 하고 지하실 단칸방에 숨어 있는가.

동거는 보통 두 가지로 분류된다. 결혼의 사전 단계냐, 결혼의 대안이냐다. 지난해 4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결혼의 대안으로 동거를 선택한 커플이 50.6%로 조금 많았다. 그 이유는 상대와 의지하며 같이 지내고 싶어서(19%),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18%), 제도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고(13%) 순이었다. 반면 결혼의 사전 단계로 동거를 택한 사람들은 집 마련, 결혼식 비용 등 경제적 이유(24%)가 가장 많았고, 결혼하기 전 살아보면서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17%), 임신해서(4%), 집안의 반대(4%) 순이었다.

하지만 동거를 모두에게 공개한 경우는 6.3%뿐이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동거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주변의 편견과 부정적 시선이 싫어 떳떳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젊은 동거 커플들은 시골에서 한쪽의 부모가 올라오면 다른 한쪽은 짐을 옮겨놓고 친구 집을 전전한다.

문제는 통계에서 확인됐다. 동거를 결혼의 사전 단계가 아닌, 결혼 형태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결행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혼이 아니라 비혼(非婚)인 것이다. 그럼 사실상 사실혼 관계인 동거 커플에 대해 국가는 어떤 입장과 정책을 취해야 하는가. 정말로 매우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경우를 자주 거론한다. 세기의 지성 사르트르-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년), 세 여자와 차례로 동거하면서 자녀 넷을 둔 64세의 법적 총각 올랑드 전 대통령 이야기 같은 문화적 토양과 관용이 있긴 하지만, 프랑스에는 시민연대협약(PACs, 팍스)이란 제도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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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랑드 프랑스 전 대통령은 네 명의 여인과 동거했다. 엘리제궁에 함께 들어갔던 동거녀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와 올랑드. 둘의 관계는 2014년 대통령 올랑드가 새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자 깨졌다. (사진=연합뉴스)

1999년 제정된 팍스는 동거 커플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 법률혼 부부와 똑같은 출산육아 지원과 사회보장 혜택을 주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법률혼은 22만 8000명, 팍스로 결합한 사람은 19만 2000명이었다. 거의 비슷해져 가고 있다. 팍스는 파트너에 대한 일정한 의무를 지는 동거 계약서를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결혼과 다른 점은 복잡한 이혼 절차 없이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계약 형태의 준(準)부부인 셈이다. 단순 동거는 팍스와 달리 법적 관계는 아니다. 경제적으로 커플이 완전히 분리돼 있고, 상대에 대한 의무도 없다. 하지만 역시 정부로부터 결혼 가정과 거의 동일한 지원을 받는다.

팍스가 준 최고의 선물은 베이비다. 1.65까지 떨어졌던 출산율이 지난해 유럽 최고치인 1.96명으로 올라갔다(우리나라는 1.05). 신생아 열 명 중 여섯 명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생아'다. 유럽에는 프랑스처럼 혼외아 출산이 전체 출산의 50%를 넘긴 나라가 8개 국이나 있다. 우리나라는 2% 미만이다. 우리나라 동거 커플은 거의 아이를 낳지 않는다.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 하고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못 하니까. 유럽에서 동거는 정말로 특별하지도, 이상한 것도 아니다. 국가가 인정하고 개입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일 뿐이다.

결혼이냐, 팍스냐. 프랑스에서 정착한 새로운 가족 형태 팍스는 한 해의 혼인신고 건수와 맞먹는다.
결혼이냐, 팍스냐. 프랑스에서 정착한 새로운 가족 형태 팍스는 한 해의 혼인신고 건수와 맞먹는다.

정말 세상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 전통적 형태의 결혼이 사라져 가는 건 꼭 경제적 이유나 결혼생활에 대한 자신감 결여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 문화에서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비혼은 이제 결코 마이너도, 아웃사이더도 아니다.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이미 20년 전인 1998년에 펴낸 '21세기 사전'에서 "2030년이면 일부일처제 결혼제도가 사라지고 90%가 동거로 바뀔 것"이라며 결혼제도의 붕괴를 예언했다.

출산율을 늘리는 일이 시급한 정부도 다양한 결혼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속도에 대한 체감은 늦은 거 같다. 신혼부부에게 행복주택을 특별공급하고 출산장려금을 주는 정책은 머지않아 비혼주의자들에게서 역차별이란 공격을 받을 것이다. 사내 복지 규정에 가족관계증명서 상의 배우자만 들어있는 회사도 외면받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랑과 결혼. 이것은 문학과 예술과 철학의 영원한 테마이자 숙제다. 유혹과 이끌림, 성적 욕망, 사랑의 감정과 가치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의 가치는 영원불멸이 아닌 게 분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0년도 훨씬 전에 젊은 두 작가가 불온한 제목으로 세상에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가.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0년 오늘의 작가상),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2006년 세계문학상)는 탁월한 예지를 보여준 소설이었다.

다시 더 생각해 본다. 혼인서약은 사랑의 완성인가, 평생 서로만을 섬기고 사랑할 것을 약속하는 건 옳은가? 세상은 이미 아니라고 대답했다. 제도보다 관계로, 이상보다 현실로 가치가 옮겨가고 있다. 유럽은 이미 그렇게 갔다. 우리도 곧 따라 갈 것이다. 동거? 고민 없이 선택하고 당당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리고 결합이 쉬운 만큼 이별도 쉬울 것이다. 그럼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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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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