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뉴스 보기가 민망하다. 미투란 말이 이젠 좀 들어갔나 싶더니 아니다. 저녁 메인 뉴스 때마다 악취가 여전히 진동한다. 별의 별 종자들이 다 등장한다. 여자 대학 강의실에서 알몸으로 음란행위를 하는 걸 셀카로 찍어 트위터에 자랑했다느니, 연예인 여자친구를 상대로  리벤지 포르노로 협박을 했다느니… 몰카는 이제 뉴스 순위에서 밀린다. 성 관련 범죄는 남자의 직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 남성처럼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수컷 종족이 있을까 싶다. 

오늘 저녁에도 그런 뉴스가 나왔다. 참다못한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요즘 남자들은 도대체 다들 왜 그리 찌질해요? 사나이들은 다 어디 갔대요?”

사나이?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이제 아재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인 나이에 사나이 운운하긴 그렇지만, 그래 나도 한때 사나이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한때 모두 ‘진짜 사나이’였다. 무장행군을 하며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악을 쓰며 불러대지 않은 대한민국 남자가 어디 있으랴. 사나이의 사전적 풀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 단순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의 남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사나이는 그냥 혈기로 구분하는가. 아내가 말한 사나이는 그런 건 아닐진대. 국어사전에 실망했다. 

문정희 시집 ‘남자를 위하여’, 1996년.
문정희 시집 ‘남자를 위하여’, 1996년.

나는 문정희 시인이 그리워한 ‘사나이’를 생각한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거대한 파도를…//몰래 숨어 해치우는/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가장 큰 실수는/바로 세상에서/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중략)/그런데 어찌된 일이야/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검은 눈썹을 태우는/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멸종 위기네”
(‘다시 남자를 위하여’ 일부) 

시인은 이 땅에 사나이가 멸종돼 감을 이렇게 한탄했다. 거대한 파도에 맞서 온 몸을 던지는 가물치 같은, 거친 평야를 바람처럼 달리는 야생마 같은 사내들이다. 그런 사내를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잡놈이라 했지만 이 여자 저 여자 어떻게 좀 해볼까 궁리나 하고 치마 속이나 훔쳐보는 찌질한 잡놈이 아니다. 시인이 그리워한 건 원초적 생명력을 지닌, 스스로에게도 강인한 잡초 같은 남자일 거다. 시인은 이 시에서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내비쳤다.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한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명나라 백과사전 삼재도회에 실린 사마천의 모습.
명나라 백과사전 삼재도회에 실린 사마천의 모습.

시인에게는 그런 눈부신 사내가 있었으니 사마천(B.C.145∼86)이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오래 잠 못 들게 하는/멋진 사나이’라며 흠모했다. 시인에게 사마천은 ‘꼿꼿한 기둥을 잘리고 기둥에서 해방되어 되레 천년을 얻은 진정한 사내가 된 사내’다. (시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기둥은 남근이자 권력이다. 시인은 세상의 남자들을 향해 ‘좀 더 튼튼하고/좀 더 당당하게/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개고기를 뜯어먹고/해구신을 고아먹고/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이는’ 족속이라고 조롱한다. 시에는 이런 주(註)가 붙어있다. ‘투옥 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고도, 수사(修史)의 뜻을 관철하여 130권의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시인의 사나이 집착증은 역사나 신화 속을 가로지르며 여러 시에 등장한다.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 몸을 불사른 신라의 천민 청년 지귀(志鬼), 강 건너 저편에 있는 미지의 이상세계를 향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푸른 강물에 뛰어든 백수광부(‘공무도하가’), 농사밖에 몰랐지만 굴욕의 삶을 쟁기로 땅 갈아엎듯 갈아엎어 버리고 참수됨으로 더욱 파랗게 살아난 ‘천둥 같은 사나이’ 전봉준,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반 고흐, 생 텍쥐페리 등 죽음조차 눈부신 사내들이 시에 불려온다. 

‘사나이’라는 말은 일단 멋지게 들린다. 부정적 이미지가 덧칠되지 않은 우리말이다. 남자는 그냥 성을 구분하는 객관적 단어지만, 사나이란 단어에는 나이와 혈기만이 아닌 함의가 있다. 대중가요가 좋아하는 이 단어는 뭐랄까, 굳이 표현하자면 존재로서의 남자와 수컷을 초월한, ‘남성성’의 가치를 한층 강화한 의미가 씌워져 있다. 사나이에 대응하는 적절한 여성의 호칭은 없어 보인다. 경상도 방언인 ‘가시나’가 좀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계집애’나 ‘아가씨’는 아닌 거 같다. 영어에도 ‘맨(man)’이란 단어뿐이지 비슷한 뉘앙스의 명사가 없으니 ‘사나이’는 매우 토속적인 단어다. 사실 고문헌을 보면 사나이의 어원은 십몇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나이’ 뒤에는 일단 금지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우는 걸 들켜서도 안 되고, 두 번 죽어서도 안 되고, 작은 일에 연연해도 안 된다. 진짜 사나이라면 사랑에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더더구나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니다. 압권은 화장실에 있다. ‘사나이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왜 유독 사나이란 말에만 금지어가 따라붙을까. 사나이라면 보통 남자와는 뭔가 좀 격이 달라야 했다. 사소한 데 한눈팔고 오욕칠정에 눈멀어 이상과 야망을 그르치면 안 되었다. 그게 바로 옛날의 ‘대장부’다. 

이 시대 사나이에게 어울리는 가치는 무얼까. 내적으로는 책임성과 강인함, 외적으로는 신사다움과 관대함, 그리고 삶에 있어서는 꿈과 이상을 향한 열정이 아닐까. 그런 남자들 요즘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사나이답게 살아가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치 않고 여자의 권익과 위상과 목소리는 높아만 가고 상대적으로 남자의 땅은 좁아져 간다. 삼포세대와 잉여남은 늘어간다. 분명한 건 사회가 발전하면서 남자가 더 득세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남자가 사나이로 크지 못하면 자칫 한순간에 여성에게 ‘한남충’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러다 ‘개저씨’로 나이 들어간다. 직장에서는 마부장(‘미생’)이 된다. 찌질한 사내들이 가정에서 마초 행세를 하고, 밖에 나가면 용감한 ‘오빠’로 돌변한다. 오늘도 TV 뉴스에는 악취가 풍기고 공중화장실에는 소변이 흥건하다. 사나이를 위하여! 눈부신 야생마를 위하여! 멋지고 당당한 잡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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