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불은 그의 생애에 걸쳐 철저히 전문적인 클라이머였다
-32살, 산에서의 죽음만이 그의 열정과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 저자 라인홀트 메스너, 호스트 회플러 공저ㅣ출판년도 2000년ㅣ쪽수 204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 저자 라인홀트 메스너, 호스트 회플러 공저ㅣ출판년도 2000년ㅣ쪽수 204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등반은 지독하게 새로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끝나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더 깊이, 더 멀리 오른다. 이것이 등반의 독특한 매력이다. 등반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195373일 낭가파르밧8,125m을 무산소 단독으로 등정한 헤르만 불이 등반의 속성을 이 같이 정리했는데 알프레드 머메리의 정신을 가장 정직하게 계승한 등산가다. 불은 그의 생애에 걸쳐 철저히 전문적인 클라이머였다. 그의 강인한 의지와 힘은 알피니즘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금 우리가 전문적이라 말할 수 있는 등산가는 월터 보나티 정도일 것이다.

불은 모든 산행 능력에 정통했지만 암벽등반에서 보다 뛰어났고, 특히 자유등반을 추구했다. 낭가파르밧 등반 이후 헤를리코퍼 등반대장과 그의 추종자들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불은 예민해졌고, 인간적인 신뢰의 상실로 고통을 받으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더 단독등반을 즐기게 되었다. 불이 알프스에서 이룬 초등들은 보나티의 그것보다 비중이 크지는 않다. 불은 신루트를 개척할 힘과 열정은 컸지만 독창적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선배들의 등반 스타일을 능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반면에 보나티는 거대한 루트에 대한 특유의 창조적인 감각과 강인함이 불과는 달랐다.

불이 창의적인 등반과 비전을 갖게 된 것은 카라코람 등반 때부터다. 브로드피크8,047m와 초골리사7,654m의 등반 방식은 미래의 슈퍼알피니즘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선구자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셀파의 도움 없이 8000미터 고봉을 2개 초등한 최초의 등반가라는 사실이 불의 탁월함을 말해준다.

불은 항상 클라이밍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의 모든 관심은 극한의 등반을 향상시키는 방법에만 집중되었었다. 자신을 냉정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정신력과 산에서의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어린시절부터 터득해 왔다. 사회과학자이며 등반가인 울리히 아우프무트는 불은 내면적으로 고독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의 성취는 그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자아는 절망의 연속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그를 만족시켜주고 회복시켜줄 사랑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사랑도 사랑으로 받지를 못했다. 32, 산에서의 죽음만이 그의 열정과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라고 불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그러나 불의 밝은 모습도 여러 곳에서 설명된다. 그는 낙관적이고 외향적인 면도 있고 기분이 좋을 때는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기타도 연주했다. 부인 제네를은 그가 일상생활이 어려울지라도 항상 긍정적이고 주관이 뚜렷했었다고 기억했다.

프랑스 필적학회의 한 필적관상가는 불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필적으로 본 불은 고집이 세고 야성적이고 지배적이다. 사람의 압력에 굴하기 보다는 대자연의 장애에 자신을 던져서 평가받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권위와 의무를 앞세우면 그는 화를 내고 반항적이 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불은 자신이 세운 원칙에 철저히 따르고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에도 균형을 지켰다. 고독한 영웅의 이런 행위는 강철같은 의지와 기질에서 나왔다. 그의 힘과 믿음은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의 충실한 실천인 것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무모한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불은 자신의 인생과 산, 가족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단지 공포와 희망, 행운 사이에 있는 심연의 민감한 경계선에서 활동을 했을 뿐이다.

불은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알프스에서 암벽등반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49년에는 몽블랑 산군을 섭렵했고, 1950년에는 자일파트너인 쿠노 라이너와 함께 마모라타 남서벽과 그랑조라스 워커 스푸르를 동계 초등정했으며 샤모니 침봉군을 최초로 횡단했다.

1952년에는 피츠바딜 북동벽을 단독으로 등정했는데 경제적인 궁핍으로 교통비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갈 정도였다. 낭가파르밧 등반 전에는 와츠만 동벽을 야간에 동계단독초등을 하고 카벨델 횡단 동계초등을 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훈련을 했다. 1955년과 1956년에는 서부 알프스에서 많은 동계등반과 단독등반, 직등에 성공했다.

알프스에서 어려운 루트들을 오르며 경이로운 기록들을 남겼지만 불의 고산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만 갔다. 19574, 오스트리아산악회 카라코람원정대에 등반대장으로 참여한 불은 고소포터가 없는 네 명의 소규모 등반대로 브로드피크 초등정에 도전했다.

낭가파르밧 초등 때의 동상으로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지만 오직 의지력으로 극복하고 69, 네 명 모두 등정에 성공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불과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초골리사에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정에 도전했다. 그러나 627, 정상 아래 300미터 지점7,300m에서 갑작스런 눈보라를 맞고 하산하던 중 불이 밟고 있던 돌출된 커니스가 무너지면서 그는 천길 아래로 추락했다.

1958년 초골리사를 초등정한 일본팀에 의해 발견된 불의 일기장에는 1957624일의 등반일지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일기장에서 불은 자신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순간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자일을 함께 묶은 동료와 정상에 섰을 때와 방금 오른 루트에 대한 감정이 머리에서 정리되었을 때, 그리고 또 다른 등반 대상지를 찾아 눈빛이 더 깊어질 때다.”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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