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평 / 메스를 잡다

의료행위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아마도 수술일 것이다. 사람의 살을 자르고, 뼈를 부수고, 피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수술은 가끔 몇 시간씩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이런 수술의 과정을 의학서적처럼 설명한다면 이보다 더 지루한 책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수술을 너무나 재미있게 표현한 책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종합병원 전문의인 아르놀트 판 더 라르(Arnold van de Laar)가 쓴 ‘메스를 잡다’(under the knife)가 그것이다.

‘메스를 잡다’는 수술의 역사를 어떤 역사 추리소설 보다 흥미롭고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은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들의 수술장면을 현미경처럼 묘사하고 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수술 장면 중 하나가 미국 존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직후에 벌어진 광경이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케네디 대통령은 피격되자 마자 사건현장에서 가까운 댈러스 파크랜드 기념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병원 응급실에는 28살의 2년차 외과 레지던트인 찰스 개리코가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총상으로 머리 한 쪽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몇 분 뒤 34살의 말콤 페리 박사가 응급실로 들어왔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값19,800원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값19,800원

케네디 대통령은 응급실에 들어온 지 22분 만에 사망했다.

책은 이 짧은 22분 시간에 응급실에서 벌어진 일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한다. 마치 눈 앞에서 보는 것 같다.

한 의사가 케네디와 암살범 2일 간격으로 수술 

케네디 대통령이 과연 1명의 범인이 쏜 총에 맞았는지 혹은 두 사람이 쏜 총에 맞았는지를 두고 혼란이 일어난 과정도 나온다.

케네디 대통령은 두 발을 맞았다. 첫 번째 총알은 목을 뚫고 들어가 몸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총알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면서 두개골이 많이 상했다.

암살범으로 리 하비 오스왈드 이외에 누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오해는 첫 번째 총알이 목을 뚫고 지나간 것과 관계가 깊다.

숨을 쉬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응급처치는 입을 열고 호흡관을 기관지까지 밀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호흡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말콤 페리 박사는 메스로 기관절개술을 실시했다. 기관을 통해 공기가 폐로 전달되도록 목을 절개해서 튜브를 넣는 수술 방법이다.

페리 박사가 목을 절개하려고 보니 목젖 바로 아래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페리 박사는 목을 절개하는 대신, 총알이 뚫고 지나가면서 생긴 상처를 양쪽으로 더 잘라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직접적인 사인은 호흡중단이다.

첫 번째 총알이 목을 관통하는 바람에 응급실로 실려오는 8분 동안 호흡이 중단돼 산소공급이 끊어진 것이다.

한편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또 다른 암살을 불렀다. 

2일 뒤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을 중계하던 방송 카메라는 암살범 리 오스왈드가 경찰 구치소에서 나와 차량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중계하고 있었다. 이 때 혼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잭 루비가 권총을 들고 나와 오스왈드의 갈비뼈에 권총을 쐈다.

케네디 암살 장면이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중계된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왈드가 암살되는 장면 역시 생중계 되는 정말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오스왈드가 응급실로 후송돼 긴급 수술을 받는 장면 역시 세세하게 묘사됐다. 케네디를 응급처치했던 바로 그 말콤 페리 박사가 하필이면 오스왈드의 응급처치도 맡았다. 대통령의 마지막을 수술한 말콤 페리는 무척 덤덤한 성격이었다고 한다.때문에 엄청난 사건을 치루고도 휴가를 내거나 근무일자를 바꾸지 않고 순서대로 당직을 서다가 두 사건의 수술을 집도하는 매우 신기한 일을 겪게 된 것이다.

레닌의 수술기록도 자세히 나와 있다. 레닌은 5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뇌졸중이다.

그러나 뇌졸중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당시 유명한 의사들이 매독, 총알로 인한 납중독 등 각각 다른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72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프랑스 루이 14세의 기괴한 생활습관도 외과의사의 관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포경수술을 한 다음 나이 들어 이삭을 낳았을 것이라고 추측한 저자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루이 16세가 오랫동안 후계양성에 실패하다가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된 것도 바로 포경수술을 한 다음이라고 설명한다.

교황에 대한 놀라운 통계도 나와 있다.

베드로 이후 지금까지 교황과 대립교황(비합법적으로 교황권을 행사한 사람)을 합치면 총 305명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황으로 지명된 후 5년 내 생존율이 불과 54% 수준이라는 것이다. 교황 다섯 명 중 한 명은 취임 첫 번째 해도 채 넘기지 못했다.

1978년에 취임한 요한 바오로 1세는 33일 만에 사망했고 1503년에 취임한 비오 3세는 26일, 9세기에 교황이 된 보니파시오 6세는 15일 만에 후임 교황에 의해 독살됐다. 752년 스테파노 2세는 선출 3일만에 숨졌다.

수 세기 동안 교황들의 공통적인 약점은 폭식이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살이 엄청나게 쪄서 하루종일 잠만 잤다. 마녀 사냥을 벌여 여성 수 천 명을 산채로 불태워 죽인 그 교황이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있다.

말년에 너무 살찐 교황의 건강을 되살리기 위해 수혈을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건강한 젊은이 세 명이 혈액을 제공했지만, 교황과 청년 3명 모두 사망했다.

물론 이때의 수혈이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교황이 피를 마셨는지, 혹은 혈관에 넣었는지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셀로판으로 대동맥류 7년간 지연시켜 

과학자의 이야기도 있다. 평생 담배를 피우고 절대로 운동을 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69살이 되면서 체중이 불었다.

아인슈타인은 1948년 갑자기 복통에 시달리자 복부대동맥류 수술을 받았다. 의사인 루돌프 니센은 일단 아인슈타인의 복부를 열었다. 담낭은 정상이었지만, 복대동맥은 대동맥류가 발생해 자몽만한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이것이 폭발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니센은 문제가 된 혈관이 아직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혈관을 셀로판으로 감쌌다. 사탕이나 빵, 담배를 포장할 때 쓰는 바로 그 셀로판이다.니센은 아인슈타인의 혈관을 샌드위치처럼 둘둘 말아 혈관 파열을 늦춘 것이다.

덕분에 자몽 크기만큼 부풀어 올랐던 대동맥은 셀로판에 싸여 7년을 견뎠다. 10cm로 커진 대동맥류를 그대로 놓아두었다면 아인슈타인은 2년 안에 사망했을 것이다.

1955년 아인슈타인이 75살이 됐을 때 다시 복통이 찾아왔다.

이때는 다행히 대동맥류를 인공혈관으로 바꾸는 수술법이 나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를 “생명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은 멋없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대신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병원에 입원해 모르핀을 맞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 사망했다.

이렇게 역사책을 수 놓은 유명인들의 수술 이야기는 피비린내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당시 시대 상황이나 위인들의 인간적인 면을 살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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