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5월 마하티르 93세 고령에 다시 총리 맡으며 역사적인 정권교체
-마하티르, 일대일로에 제동...한국 기업은 반색
-학계는 현 정부 신남방정책에 더욱 힘 실어줄 것이라 기대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지난 5월 말레이시아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단 한 차례도 정권을 빼앗기지 않은 여당 국민전선(Barasan National, BN)이 총선에서 야당연합인 희망연대(Pakatan Harapan)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로써 말레이시아 정치를 대표하는 일당우위체제도 2018년을 끝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민족이 모여사는 다민족국가다. 말레이계가 대략 60% 이상, 중국계가 20% 이상, 인도계가 10% 내외를 차지한다. 말레이계를 대표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이 중국계 기득권과 인도계를 포섭하여 국민전선을 구축했고,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

반대로, 중국계나 이슬람 근본주의 대안 세력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을 창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야당은 한 곳으로 힘을 뭉쳐 국민전선에 대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8년 말레이시아 총선 결과.
2018년 말레이시아 총선 결과. 희망연대가 하원의석 총 222석 중 113석을 획득하며 다수당이 되었다. 60여년 간 정권을 독식하던 국민전선(BN)은 79석에 그쳤다. (사진=PUDUVAI)

무적의 국민전선 역시 2008년 총선에서의 위기 이래, 장기집권의 끝이 머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 총리인 나집 정권의 부패 문제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억눌린 중국계 주민의 불만이 동시에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말레이시아의 사바, 사라왁 주의 원주민들도 중앙정부의 통제권을 점차 벗어났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번 총선을 모든 잠재적 불안 요소가 종합되어 드러난 결과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물품용역세(GST)의 도입이 직격탄이라는 의견도 많다.

◆ 93세 고령으로 총리직에 오른 마하티르는 누구?

정권 교체 그 사실에 못지않게 주목을 받은 것이, 야당의 승리로 다시 한번 총리직에 오르게 된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의 리더십이다. 현지 언론은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가난한 농업 국가를 제조업 강국으로 변모시켰던 마하티르 전 총리가 경제 침체 상태인 말레이시아를 되살릴 수 있다는 열망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마하티르 총리. (사진=연합뉴스)
마하티르 총리. (사진=연합뉴스)

15년 만에 총리에 복귀하는 마하티르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국부(國父)`와 독재자로 극명하게 갈린다. 말레이시아 산업화를 본궤도에 올려놓은 공(功)과는 별개로 인권 탄압 등 과(過)가 동시에 따라다닌다. 1925년 영국 식민 치하 말레이반도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7년 여당 소속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한 마하티르의 초기 정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내 비주류였던 그는 1969년 툰쿠 압둘 라만 당시 총리가 말레이계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다가 정계에서 축출됐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마하티르는 1972년 툰쿠 총리가 사임한 뒤 복귀해 각 부처 장관과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결국 1981년 후세인 온 당시 총리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자 총리직을 승계했고, 2003년까지 22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총리 재직 당시 그는 경제성장을 먼저 이뤄낸 한국과 일본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룩이스트(Look East)` 정책과 말레이시아를 2020년까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겠다는 `와와산 2020` 등을 주창하며 강력한 국가 주도 경제 발전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말레이시아는 1990년대 들어 신흥 공업국 대열에 올라섰고, 국내총생산(GDP)은 1981년 250억 달러(약 27조 원)에서 2003년 1100억 달러(약 120조 원)로 급격히 증가했다. 빈곤 가구 비율도 35%에서 5%대로 떨어졌다.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측 권고를 일축하고 고정 환율제 채택, 외국 자본 유출 금지 등 독자적 조치로 경제를 회복한 것도 높이 평가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을 추앙한 마하티르 전 총리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지체해도 된다는 정책을 고수했다. 특히 경제적 기득권을 쥐고 있던 중국계 주민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레이시아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중국계 주민들의 파이를 빼앗아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 교육, 의료, 법조계 등 거의 전 분야에서 말레이계에 대한 우대 정책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말레이계 우대 정책'은 오늘날 중국계 인력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현상의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또한, 2003년 이후 퇴임한 마하티르 전 총리는 기업가와 재단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막후에서 정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상왕`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실제로, 마하티르 총리는 나집 전 총리의 후견인이다. 나집과는 사제 관계였던 셈이다. 하지만 나집 총리에 대한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그는 단호하게 나집과 결별했다. 그 결과, 마하티르 전 총리는 2016년 여당에서 축출됐으며, 지난해 말 극적으로 야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2018년 다시 한번 총리직에 오르며 그가 수십년 간 몸담았던 국민전선에 대한 일발 역전에 성공했다.

◆ 일대일로 좋아하지 않는 현 총리...한국 기업엔 기회?

현재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 내 중국색 지우기에 한창이다.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일환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공들여 오던 동부해안철도(ECRL)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5월 27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지난해 왕융(王勇) 중국 국무위원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참석해 대대적인 기공식까지 열고 진행하던 공사에 전격적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ECRL은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구간이다. 중국 윈난성 쿤밍(昆明)에서 시작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은 뒤 전략적 요충지인 믈라카 해협의 무역항인 클랑으로 이어진다. 동남아의 육상·해상 운송망을 구축해 장악하려는 계획의 정점에 ECRL이 있다. 예정대로라면 2024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마하티르의 발표로 사업 전체가 불투명해졌다.

ECRL은 말레이시아 땅에서 진행되는 공사지만, 중국 국내 토목공사처럼 진행됐다. 시공은 중국교통건설이 맡았고, 550억 링깃(약 15조 원)에 달하는 사업비의 85%는 중국수출입은행이 빌려주기로 했다. 마하티르는 이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우리가 중국에서 돈을 꿔다가 건설비를 대고, 그 건설 비용이 말레이시아로 들어오지 않고 중국 업자들에게 지급되다니, 이상한 계약"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만약 ECRL 사업이 재개되더라도 마하티르는 중국의 입김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업 조건을 대대적으로 손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대일로 사업 구상도. (그래픽=연합뉴스)
일대일로 사업 구상도. (그래픽=연합뉴스)

이에 아왕 아즈만 아왕 파위 말라야대 말레이학술원 사회문화학부 교수는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레이시아 국내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경우 중국과 한국을 두고 저울질해야 한다면 대다수는 한국을 선호할 것"이라며, "한국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감옥에 보낸다. 법치와 투명성이 입증된 것이다"고 밝혔다.

아왕 파위 교수는 이어,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일본 등의 투자를 바라고 있다. 이건 상당히 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의 경우, 일대일로 사업에서도 드러나듯이 미심쩍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ECRL의 경우 건설 사업의 경우 총사업비가 550억 링깃(약 15조원)이지만, 마하티르 총리는 실제 사업비는 300억 링깃 정도라고 보았다"며, "한국이었더라면 부정직한 행위를 우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마하티르는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재계는 기대감 감추지 못해

국내의 한 말레이시아 전문가는 과거 "말레이시아는 세계은행이 발표한 기업환경평가(Ease of doing business)에서 190개국 중 24위를 차지할 만큼 사업 환경이 좋으며, 건설시장 규모도 451억 달러 수준이다.”라고 언급하며, 총선 이후 건설시장이 더욱 활기를 띌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 나집 정권 시절에도 경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말레이시아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의 7%를 중국이 차지하는 등 중국 의존도가 심했다. 

건설업계에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 건설 업체 관계자는 “마하티르 총리와 한국의 인연은 각별하다. 재임 당시 우리 기업이 세계 최장대교인 페낭대교, 말레이시아 랜드마크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수주해 성공적으로 건설한 바 있다. 또 여러 차례 방한해 우리의 높은 기술력, 근면성에 놀라며 우리 기업과의 협력에 앞장서기도 했다.”며 말레이시아와의 파트너십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마하티르 전 총리의 재임 기간(1980.7~2003.10) 중 우리 기업이 말레이시아에서 수주한 실적은 140건, 71억 달러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싱가포르에 이어 네 번째로 나타났다. 이어 퇴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총 126건, 127억 달러를 수주하며 13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엔지니어링이 말레이시아에서 3.6억 달러 규모의 멜라카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며, 삼성물산 역시 4.6억 달러 수준의 Merdeka PNB118 타워 신축공사에 참여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한국의 삼성물산과 일본의 하지마건설이 한 동씩 나누어 건설했다. (사진=픽사베이)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한국의 삼성물산과 일본의 하지마건설이 한 동씩 나누어 건설했다. (사진=픽사베이)

◆ 학계도 신남방정책의 '호기'에 뜨거운 반응

학계는 마하티르 신정부가 중국과의 일대일로 사업 재검토 등에서 보여지듯이, 실리에 기반한 균형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과거 재미를 보았던 동방정책 등을 재활성화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최근 내놓은 ‘말레이시아 신정부의 경제정책과 신남방정책에 대한 시사점’이란 보고서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신(新)남방정책(아세안 국가와의 교류 증진)을 근간으로 한 양국 간 경제 협력의 모멘텀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한다.

신민금 KIEP 전문연구원은 이 보고서에서 “신정부가 동아시아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점, 과거 서방 선진국이 아닌 동아시아 국가(한국·일본)를 경제성장 모델로 삼은 점 등은 한국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특히 우리 정부의 신남방정책이 말레이시아의 동방정책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양국 간 정상급 교류를 통해 말레이시아와의 협력을 타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가 한국에 있어 주요 자원 공급처, 건설 시장, 중동 진출 교두보 측면에서 전략적인 국가이고 GST 폐지, 연료보조금 부활 등 신정부의 공약 이행으로 내수 회복이 이뤄지면 우리 기업에 고급 소비재 및 할랄 식품 분야의 진출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신민금 연구원은 또한 “국제유가 상승 기조로 말레이시아의 주요 산업인 석유화학 부문 설비투자가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 석유화학 기업들은 관련 프로젝트 입찰 현황을 예의 주시하고, 현지 국영석유기업 페트로나스(Petronas)와 석유화학 분야 제3국 공동 진출 기회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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