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화 '모델'은 나라마다 다양...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 없어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케랄라 모델'도 오늘날 명과 암 존재
-한국에서 분권화가 반드시 필요한 개념인지는 더 많은 논의 필요해

[데일리비즈온 박종호 기자] 문재인 정부의 집권 이후 분권화에 대한 논의는 늘 있어왔다. 그 필요성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널리 인정받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분권화 모델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분석과 전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현 정부가 추구하려는 분권화가 지자체 간 예산과 세수확보의 불균등성을 조정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할 것인지, 아니면 수도권 중심의 기능 분산화에서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우선순위 정리도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

한편에서는 분권화를 통한 북유럽식 복지국가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북유럽 복지선진국의 사례들도 꾸준히 소개되는 추세다. 그런데 기존에 소개된 국가의 사례들은 한국보다 경제 수준이 높거나, 인구수가 적어 복지사회를 구축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거나, 아니면 복지정책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에서 유럽식 복지국가의 설립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졌을 때 분권화를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앞선 기사에서 이야기하였 듯, 분권화는 여러 정치적 변동 하에서 얼마든지 자생할 수 있다. 또한, 뒤에서 이야기할 인도의 사례에서처럼, 복지국가 건설은 늘 경제발전에 후행하는 종속변수인 것은 아니다.

이번 '분권화의 경제학' 연재에서는, 분권화의 다양한 모델들이 존재할 수 있음과 더불어, 분권화로 인한 파생 효과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오늘 소개할 인도 케랄라 주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이른바 '케랄라 모델'의 명과 암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늘날 아직 구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향후 한국의 분권화 모델을 수립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인도같지 않은 인도...케랄라 모델의 성공 비결

인도 최남단. 서남부 해안에 접하고 있으며, 동아라비아해와 마주하며 성장해 온 케랄라(Kerala) 주(州)는 우리가 상상하던 인도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열대의 야자나무 숲이 우거진 호수와 수로를 따라 유유히 떠다니는 하우스보트(house boat), 거대한 산 능선을 따라서는 차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 각기 다른 종교 문화가 조화를 이룬 유적들과, 저 멀리 북인도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주민들의 삶의 모습은 이 지역 여행길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카스트와 상관없이 소고기가 들어간 커리를 먹는 이 곳의 현지인들, 알고 보면 우리말이나 정서와 비슷한 점이 많은 '말라얄람'(케랄라 주 공용어) 등 여러모로 흥미로운 요소도 많다.  

케랄라의 명물 하우스보트. (사진=박종호 기자)
케랄라의 명물 하우스보트. (사진=박종호 기자)

더욱 중요한 점은 케랄라 공항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공항에 비치된 케랄라 안내 책자에는 케랄라가 인도에서 가장 깨끗한 지역으로 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문맹률 0%, 인도에서 유아사망률이 가장 낮고 평균 수명이 가장 긴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현지인들은 케랄라가 남녀 간, 카스트 간 차별이 가장 적은 곳이라는 점에도 공감한다.

이러한 성취는 일찍부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높은 삶의 수준이 가능함을 보여준 케랄라의 사례는 '케랄라 모델'이라는 새로운 발전 전망을 제시했다.  

케랄라 모델의 건설은 1957년 총선에서 인도공산당이 주 정부를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산당은 1967년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하고 케랄라의 발전을 주도했다. 집권 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75년에 UNDP(유엔발전계획, United Nation Development Program)는 케랄라가 기근을 해소하고 교육과 보건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인도에서 가장 높은 기대수명과 문자해독률을 가진 주가 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2015년의 인도 내 각 주 별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 인간개발지수는 개인의 삶의 질을 수치화 한 것으로,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높다. (이미지=유엔개발계획)
2015년의 인도 내 각 주 별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 인간개발지수는 개인의 삶의 질을 수치화 한 것으로,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높다. (이미지=유엔개발계획)

케랄라가 이렇듯 탁월한 사회적 성취를 보인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케랄라가 과거 바스코 다 가마(포르투갈의 항해탐험가)의 탐험에서 보여주듯이, 우호적인 지리적 조건에 놓여 있다는 점, 일찍부터 선교사와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며 대중운동에 익숙했다는 점, 민중의 생활개선에 관심이 많은 공산당이 오래 집권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최근에는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민주적'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케랄라 모델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 똑같이 공산당이 오래 집권한 웨스트뱅갈 주에서는 주민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왜 유독 공산당이 케랄라에서 오래 정권을 잡고 또 민주화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속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케랄라를 이끄는 세 축은 '국가, 시장, 시민사회'..."경제문제 회피" 비판도

학계에서는 80년대 말 인도국민회의의 일당체제가 막을 내리자, 그 과정에서 힘을 보탠 주 정부들의 분권화 요구가 인도의 분권화 개헌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경우 특기할 점은 기존의 중앙정부-주정부의 정부간 관계가 중앙정부-주정부-(주정부 하의)지방정부로 개편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말로는 '촌락정부'라고도 번역되는 지방정부에게 더 많은 예산과 권한이 주어졌다. 대중들의 정책참여를 권장하던 케랄라의 주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케랄라 주 내에서 공산당 깃발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박종호 기자)
케랄라 주 내에서 공산당 깃발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박종호 기자)

같은 시기에 인도공산당은 경제적 엘리트가 지배하는 경제로부터 시민사회가 지배하는 경제로의 변화를 추구했다. 협동조합적 의사결정구조를 추구한 것이다. 아울러, 국유화와 사유의 대립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소유방식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국가와 시장 외에 시민사회라는 경제주체를 설정했다. 즉 시민사회가 경제에 전략적으로 개입하고 국가의 경제활동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가 각각의 큰 축을 이루는 거버넌스가 케랄라 모델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델이 과연 90년대 케랄라에 가장 요구되는 분권화 모델이었을까? 이에 대해선, 점차 부정적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새로운 케랄라모델은 복지를 일부 포기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강화시켜 경제적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케랄라 모델의 위기는 경제침체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은 정치영역에서 분권화 확대를 대안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케랄라는 아직도 주 생산에 있어서 어업이 중심"이라며 "분권화의 효과란 주민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어획 구역을 나누고, 어획량을 늘리고 나누는 주제에만 집중케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의 발전적 논의가 제기되지 않는다고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케랄라에는 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젊은이들은 모두 이란과 UAE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나이든 이들은 해외노동자들이 송금해주는 금액에 의존한다. 따라서 작은 환율변동이나 대외변수에도 주 경제가 휘청휘청한다. 요즘같이 루피화가 약세일 때에는 그나마 낫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란이 미국에 경제제재를 받거나, 원유 생산이 둔화되거나, 결정적으로 중동 건설경기가 불황일 때에는 케랄라의 경제도 덩달아 암울해지곤 했다.

최근 있었던 대규모 홍수사태는 케랄라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케랄라주는 우기에 집중되는 호우로 자주 홍수 피해를 겪는 곳이지만, 지난달 8일부터 15일 중 예년보다 250%나 많은 비가 내렸다. 사망자는 370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재산 피해도 1900억 루피(약 3조590억 원)로 추산되고 있다. 주 정부에서는 이에 대비한 예산이 없을 뿐더러,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을 마땅찮아하는 현재 집권 중앙정부도 케랄라의 구호에 소극적이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올해 케랄라의 홍수는 100년만이라는 평가다. (사진=연합뉴스)
올해 케랄라의 홍수는 100년만이라는 평가다. (사진=연합뉴스)

◆ 우리 시대의 분권화...섣부른 예상, 장밋빛 전망은 곤란

분권화는 본질적으로 개인과, 행정, 그리고 정치권력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이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을 통해 접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임은 자명하다.

한 전문가는 "분권화가 어쩌면 우리 시대에서는 위험한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케랄라의 경우가 경제문제를 정치문제로 전환해서 대처했듯이, 우리 역시 사회문제를 정치적 분권화로 덮으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중앙 정부는 강원도나 경상도 등 일부 지역에서의 고령화로 인해, 미래에 예상되는 부정적 효과를 주민들의 복지 수준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미루고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방 정부의 권한이 늘어난다면,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는 지방 정부의 정책은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현재 독일의 지방정부들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정책의 대부분은 인구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으로, 유치원과 학교 문을 닫고, 행정기관을 폐쇄하는 일 등이다. 즉, 기존 시설과 서비스를 줄이고 없애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편의시설들 간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주민들의 삶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농민이 건축허가를 신청할 때, 주민이 민원을 제기할 때, 의원이 지역 주민을 만나러 갈 때,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주민들을 위한 편의는 더욱 더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이와 같은 경우, 중앙정부가 다른 지자체에서 발생하는 재원, 혹은 국민 세금을 동원해 여러 방법으로 해당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행정 및 비용의 편의를 희생해서 주민들의 복지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렇듯 '지자체의 사정은 지방정부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우리가 해야한다'는 논리와 배치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분권화는 인구와 행정 간의 관계가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으로 종종 언급된다. 독일의 경우 연방 주와 그 하부 단위인 구(區)의 지도를 개편하면서, 사회복지, 아동복지, 일부 도로의 개보수, 쓰레기 처리, 응급의료 서비스만큼이나 행정 경쟁력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행정구조를 인구변화에 맞추어 변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비용절감을 위해 구와 구 사이의 통합이 이뤄졌고 그 결과 방대한 구가 탄생했다. 이에 따라, 이동이 제한되는 노인들,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따라서 몇몇 분권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분권화가 오히려 불평등을 더욱 더 심화시킬 것이라 전망한다. 한 학자는 "지자체간 불평등 때문에 분권화를 시행한다는데, 돈이 많은 지역에 더 많은 돈을 주면 불평등은 더 심화되지 않겠나?"고 비판한다. 사실 이 같은 주장은 몇몇 국내 학자들만의 주장은 아니다.

본지에서 인터뷰를 시행한 케랄라 주 코친 시의 라자기리 대학교. (사진=박종호 기자)
본지에서 인터뷰를 시행한 케랄라 주 코친 시의 라자기리 대학교. (사진=박종호 기자)

케랄라 주 코친에 위치한 라자기리 대학교의 한 경제학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분권화가 추구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복지 국가의 건설인가? 아니면 지자체 간 불평등을 줄여서 경제 성장의 리스크를 좀 없애보고자 하는건가?"고 짚은 바 있다. 

하지만 어느 쪽도 한국의 실정에 맞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권화는 한국 같이 성장이 끝난 국가에게는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나마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의 분권화 구상에 경고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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