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파타고니아의 악천후와 살인적인 강풍, 강추위, 폭설은 상상을 초월한다
- 파타고니아에서는 공포와 즐거움, 우정, 엄숙함과 환희, 용기와 비굴, 성공과 실패, 인내라는 단어의 정확한 개념을 가르쳐 준다.

■ 저자 그레고리 크라우치ㅣ출판년도 2002년ㅣ쪽수 256쪽ㅣ출판사 랜덤하우스
■ 저자 그레고리 크라우치ㅣ출판년도 2002년ㅣ쪽수 256쪽ㅣ출판사 랜덤하우스

[ 호경필 전문위원] 남미 파타고니아의 악천후와 살인적인 강풍, 강추위, 폭설은 상상을 초월한다. 선원들의 세계에서 남위 40도와 60도 사이는 포효하는 바다와 거친 하늘, 가공할 폭풍과 강풍으로 요주의 대상이었고, 수세기동안 탐험가와 작가들의 집중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마젤란이 첫 번째 항해에서 해협을 발견했고 찰스 다윈은 바람의 세계인 스텝과 티에라 델 푸에고 피요르드를 탐험했으며, 생텍쥐베리는 안데스 산맥을 바람과 모래, 별들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그레고리 크라우치는 파타고니아 산군에서 다양한 등반경험을 축적했다. 특히 세로토레 서벽 동계 초등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그레고리는 이 지역에서의 등반의 본질을 “등정보다는 살아서 돌아오는 생존에 있다”고 규정했다. 고도라는 것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고 등반의 난이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곳에서 최고의 도전 대상은 수직의 거벽이다.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는 이곳의 대표적인 등반 대상지며 전자는 벽 높이만 3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밋이고 주변의 경관을 압도한다. 반면 후자는 우아한 오벨리스크이며 품위있고 날씬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환상적인 완벽한 모습이다. 세로토레는 피츠로이에 비해 고도가 다소 낮지만 등반의 난이도와 위험성, 곤란함과 두려움은 훨씬 자극적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관대함이나 용서라는 단어를 허용하지 않는다. 클라이머들이 몰려와서 연출하는 드라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아무런 표정없이 서 있을 따름이다.

클라이머들은 파타고니아에서 옛날 목선을 운항했던 선원들의 지혜로 바람과 폭풍의 속성에 정통해야 한다. 매 순간마다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점검한다. 모든 행동의 결정과 판단, 선택이 바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연의 맥박이 등반가의 혈관에도 동일하게 요동쳐야 한다. “산에 왜 오르고 폭풍은 왜 그렇게 심한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파타고니아에서는 사치스러운 엄살이고 공포와 즐거움, 우정, 엄숙함과 환희, 용기와 비굴, 성공과 실패, 인내라는 단어의 정확한 개념을 가르쳐 준다.
 
그레고리에게 세로토레에서의 고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친구들이 세로토레 등반의 무모함과 무책임을 지적했지만 그곳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자신의 세계가 있고, 그것을 만나고 싶은 갈증에 또다시 오른다. 벽의 균열 틈새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얼음물은 그레고리와 알렉스 홀의 장갑 속까지 적시고, 강풍은 구름과 비를 뿌려대며 그들의 얼굴을 꽁꽁 얼려준다. 아래에서는 돌풍이 미친 듯이 위로 치솟아댄다. 정신착란 증세로 혼미해지기도 한다. 팔과 등, 등산화 속까지 얼음물이 스며든다.

입술이 파래지면서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하고 콤프레서 루트의 절반을 오른다. 그레고리의 손이 부어오르고 발의 통증이 심각해졌다. 그들은 16시간 동안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 등반을 시작한 지 3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통의 연속이다. 이번 시즌 여섯 번의 등정 시도가 모두 무산되었고, 다음날 아침 사악한 바람은 이들을 베이스캠프로 끌어 내리고 만다. 세로토레에서는 허약한 사람들의 최대 생존무기인 ‘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레고리는 알람 시계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1주일 이내에 베이스캠프를 떠날 일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헤드램프를 켜고 고도계를 들여다봐도 별 감정의 변화가 없다. 이곳에서 바람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에게 좋은 날씨는 두려움과 공포의 징조로 다가온다. 날씨가 좋아지면 자신의 컨디션과는 무관하게 등반에 나서야 되고, 그러다가 벽 중간에서 폭풍을 만나 갇히게 될 때의 그 끔찍한 테러는,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 된다. 벽에서의 바람은 지옥을 향한 서곡이자 혼돈의 늪으로 빠지는 블랙홀이다.

알렉스와 그레고리는 콤프레서 루트 1/3지점인 페이션스 콜 얼음동굴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뜬눈으로 보내고 있는데, 덜덜덜 추위에 떨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경멸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다름 아닌 새로 닥쳐온 강력한 폭풍이었다. 그들은 다시 베이스캠프로 철수했다. 3주일이 지나고 네 번의 등정 시도가 더 있었지만 페이션스 콜에서 1~2피치 더 전진했을 뿐이다. 새로운 파트너 짐 도니니와 스테판 히어마이어가 합류했고 눈과 얼음, 바위의 혼합등반 루트를 빌레이(확보) 없이 동시등반으로 신속하게 통과하여, 초저녁에 페이션스 콜에 도달했다.

파타고니아 등반에서 최고의 미덕이자 가장 안전한 등반방식은 속공이다. 폭풍이 닥치기 전에 등정해서 하산까지 마치는 것이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까지 가능한 한 정상 부근에 도달하기로 하고 야간 등반을 강행했다. 어둠 속이라 공포가 사라지고 등반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날이 밝아오면서 극도의 위험에 노출된 자신들의 모습이 확연해지자 낯선 공포에 휩싸인다.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불길한 가운데 8주일만에 정상에서 가장 근접한 지점에 도달했다. 서풍이 불어 긴장되었지만 폭풍이 오기 전에 등정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이 지점에서의 후퇴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파타고니아의 신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기회를 만들 작정이고 위험한 게임을 즐길 것이다.

바람이 거세지고 구름이 그들을 에워싼다. 폭풍은 광란의 금속 전자음을 내며 이성을 잃게 하고 세로토레와 토레에거 사이로 몰아친다. 개 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교회종소리 또는 오르간의 불협화음 같기도 한 굉음이, 마치 지옥으로 유인하는 파이프 연주 같다. 혼합등반 구간에 들어서고 이 루트의 초등자인 마에스트리의 볼트 래더를 만나기 시작하는데, 정상적인 상태라면 이 볼트 래더가 구세주가 되었겠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서릿발 굵은 암빙지대를 벗어나자 버섯 모양의 정상 설원이 나타났다. 두 명의 스위스 대원도 정상부 중간지점에 진입하고 있었다. 초등 후 26년째 방치되어 있던 마에스트리의 에어 콤프레서가 나타났다. 이 엄청난 금속제품을 이곳까지 올린 사실에 놀랄 뿐이다. 이제 정상까지는 40여 미터 남았다. 스위스 팀이 갑작기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한다.

그레고리에게도 선택을 강요당하는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3~4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악천후에 점보 제트기의 최고 엔진출력 소리를 내며 휘감는 폭풍이다. 정상에는 도달할 수 있어도 하산에는 자신이 없어진다. 정상까지 비록 40미터 떨어져 있지만 안전으로부터는 1,500미터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레고리는 단호하게 하산을 결정하고 아이스타워까지 철수한다.

스테판과 짐이 직장과 가족 때문에 돌아가고 찰리 파울러가 도착했다. 67일이 지났고 14번째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그레고리는 육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58일동안 하루 2시간 30분씩 자고 한끼만 먹는 훈련을 받았었는데, 여기 세로토레 등반에 비하면 보이스카웃 여름캠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레고리는 커피를 끓이며 긴장이 된다.

이번이 마지막이 되길 간절히 빈다. 웅장한 세로토레는 더 이상 감동을 주지 않았고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날씨가 좋아졌지만 무척 춥고 바람이 약간 분다. 그레고리와 찰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위축되어 있다. 세로토레 정상 부근에 이는 폭풍 테러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스타워를 통과하고 드디어 버섯 모양의 오버행 아래를 넘어선다. 68일간 14번의 도전 끝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성취의 환희도 잠시, 이제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밤을 넘어서야 한다. 침낭 없이 여우구멍 같은 좁은 크레바스에서 밤새 떨었지만, 세로토레라는 이 거대한 집에서의 하룻밤은 그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동녘에 빨간 빛이 들자 얼음둥지를 빠져나온다. 구름 한 점 없다. 뼛속까지 스미는 지독한 추위였지만 견딜만했다. 문명의 세상을 벗어나 얼음과 바위뿐인 이 황량한 세계에는 불가능성, 예측 불허의 날씨, 멀미 나는 높이와 숨막히는 고요만이 상존한다. 하늘은 어두운 색에서 오렌지 빛깔로, 다시 붉은 색으로 현란하게 색을 바꾸며 채색된다.

노란색이 오렌지색을 밀쳐내자 태양이 지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르며 파타고니아의 봉우리와 리지에 금빛 생명을 선사했고, 그레고리에게 남은 것은 이제 고물이 된 장비와 필름더미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여비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파타고니아에서 얻은 보물은 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팔지 않는다. 알렉스와 찰리, 스테판과 짐과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그에게 부족한 것도 없다. 그는 부자가 돼서 파타고니아를 떠났다.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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