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인도-미국 난다데비 합동원정대 조직
-난다데비神은 그의 딸로 환생했다.

■ 존 로스켈리 지움ㅣ출판년도 1987년ㅣ쪽수 237쪽ㅣ출판사 스택폴북스
■ 존 로스켈리 지움ㅣ출판년도 1987년ㅣ쪽수 237쪽ㅣ출판사 스택폴북스

[호경필 전문위원] 1960년에 히말라야의 마셔브룸을 초등정하고 1963년에는 에베레스트 서릉을 초등정했던 미국의 윌리 언쏘울드는, 1949년 인도 북부지역을 트레킹하면서 난다데비(7,816m) 봉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딸을 얻게 된다면 이름을 ‘난다데비’로 짓겠노라”고 다짐했다.

1976년, 난다데비 초등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인도-미국 난다데비 합동원정대’가 조직되었고, 아버지 윌리와 딸 난다데비 언쏘울드(이후 데비)는 원정대장과 대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평소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난다데비 산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가득했던 데비에게 꿈이 이뤄진 것이다. 13명으로 구성된 합동원정대는 1975년 봄부터 원정준비를 서둘렀다.

1976년 7월 6일, 인도의 뉴델리에 도착하면서 등반이 본격화 되었고, 7월 24일에 존 로스켈리와 루 레이차트가 5,200미터 지점에 리지캠프를 확보하면서 등반이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눈사태와 악천후는 이들을 지루하게 만들었고 대장과 대원들 간의 의견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깊어져 갔다.

히말라야에서의 등반은 기다림과 인내의 게임인데 상황을 더 침울하게 만든다. 데비는 캠프에서 활달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각 텐트로 식사를 나르는 등 답답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고 편하게 감싸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설사와 감기, 탈장증세가 주기적으로 발병하면서 불안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8월 2일, 5,800미터 지점에 캠프1이 건설되고 캠프2로의 개척이 진행되었다. 윌리는 50이라는 나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도를 높이면서 더 힘을 발휘했다. 다시 찾아온 폭설과 눈사태는 대원들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테스트했다.

산에서 비슷한 위험과 고통을 나누며 대원들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법대생인 앤디 하바드와 데비는 서로 개인적인 감정을 느끼며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산에서의 이러한 관계는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될 수 있고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둘이 가까워져서 항상 같이 움직였고, 쉬는 날이거나 누구 하나가 아프면 두 대원 모두 등반에서 빠지곤 했다.

그러던 중에 앤디와 데비가 고소캠프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대 대장이자 아버지인 윌리는 그들의 산상약혼을 축하해 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등반이 한창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그들은 비밀스럽게, 그러나 행복한 약혼을 하기에 이른다. 6일간의 지루한 폭설과 폭풍으로 데비의 기침이 더 심해졌다.

(자료=Nanda Devi(고도:25,643ft /7815m)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인도와 네팔국경에서높은Kangchenjunga에 이른다)
(자료=마운트 Nanda Devi, 인도. keywordsuggest.org / Nanda Devi(고도:25,643ft /7815m)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인도와 네팔국경에서높은Kangchenjunga에 이른다)

8월 22일, 존과 루가 6,900미터 지점의 북릉에 올라서면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창가방과 카메트, 다울라기리가 보이는 위치에 캠프3가 세워졌다. 8월 26일, 수직으로 솟은 북릉 버트레스를 짐 스테이츠와 존이 9시간의 극한등반으로 정상을 향한 길을 확보했다. 7,000미터 고도에서의 암빙岩氷 혼합등반은 기술적으로 고난도의 등반수준을 요구했다.

이때 하위 캠프에서는 등반루트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버트레스를 직등하는 길은 어려워서 많은 대원이 등정을 못하니 왼쪽으로 트래버스하는 길을 개척해야 하고, 또한 고소적응이 제대로 안 된 데비를 1차 등정조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트레스를 통과해야 되고 캠프4도 올려야 하는데 두 갈래로 갈린 팀웍에 봉착한다. 극한등반으로 인한 체력소모와 팀의 분열이 등반의 조직적인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

8월 29일,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버트레스를 돌파했지만 캠프3에 있던 고소포터와 대원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심각한 상황이다. 하위 캠프로부터 식량과 연료를 이동시켜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고소적응이 되지 않아 무기력하기만 했다. 하지만 8월 31일, 7,300미터 지점에 캠프4를 건설하고 다음날 오후 2시 짐과 루, 존은 미국독립 200주년 기념 깃발과 인도기를 들고 정상 등정에 성공한다.

데비와 앤디, 피터는 2차 등정조로 선발되었다. 데비의 탈장증세와 계속되는 기침으로 고도를 높이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등반을 만류해 보았지만, 데비와 윌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하고 만다. 그동안 터졌던 대원들과의 의견 충돌과 대립으로 불신이 더 깊어진 결과다. 9월 3일, 데비는 어렵게 캠프4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날씨가 나빠졌고 데비는 천천히 탈진되어 갔다.

앤디가 데비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심한 트림과 오한으로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하위 캠프에 머물러 있던 아버지가 올라왔다. 2인용 텐트 속에서 네 명이 고통스런 밤을 보냈다. 더 이상의 등정 시도를 포기하고 캠프4에서 철수 준비를 하는 동안 데비의 얼굴이 부어 오르고 파란 빛으로 변해갔다.

갑작스런 돌풍이 그들의 하산을 지연시켰고 데비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버지와 약혼자는 데비의 몸을 침낭에 넣고 지퍼를 채워서 난다데비 북서벽 7,300미터 지점의 한 끝에서 난다데비神의 품속으로 그녀를 밀어 떨어뜨렸다. 그녀는 난다데비峰에 대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면서, 또 그녀의 꿈을 이루면서 사라졌다.

인도의 한 친구가 그녀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1949년 윌리가 난다데비봉을 처음 보며 딸에 대한 약속을 다짐했을 때 난다데비神은 그의 딸로 환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성한 존재를 모른 채 죽어야 할 운명으로 이승에서 몇 년간 산 것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 원정등반을 이용했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한 神이었다.”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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