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Naked Mountain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 크로우드프레스 펴냄 |320쪽
■ The Naked Mountain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 크로우드프레스 펴냄 |320쪽
山書散策 (산서산책) 은 해외 산악도서 해제를 통해 등산가들이 극한지대에서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등산의 가치와 역할을 공유하고자 한다. 워킹을 주로 하는 하이커부터 친목과 건강을 위해 산을 찾는 웰빙파 등산객, 암벽등반을 즐기는 열혈 클라이머, 큰산을 꿈꾸는 전문산악인들 모두에게 등산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호경필 전문위원]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돌로미테 산군에서 자란 라인홀트 메스너(1944년생)는, 1960년대에 이미 돌로미테의 석회암 거벽들을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메스너는 알프스에서의 경이로운 등반 기록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최고의 무대인 히말라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을 기회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1970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칼 헤를리코퍼 박사가 메스너를 초청하면서 성사됐고, 마지막 단계에서 대원 한 명이 탈락하면서 동생인 귄터가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번 원정대는 4천미터나 되는 루팔 벽을 공략하기 위해 밑에서부터 고정 로프를 깔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는 방식이어서 규모가 컸다. 메스너 형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 나갔다. 특히 메스너는 강하고 큰 폐활량 때문에 건조하고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놀라운 힘과 능력을 발휘했고 자신이 고소체질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러한 생리학적인 탁월함에다가 뛰어난 등반기량과 강인한 의지는 등정조의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메스너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등정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대장에게 6월 26일의 일기 예보가 나쁘게 나오면 베이스캠프에서 빨간 불꽃을 쏘라고 부탁했다. 그 신호는 메스너가 단독으로 등정을 시도하기 위해 최종 캠프에서 대기했다가 폭풍이 닥치기 전에 빠른 속도로 등정한 다음 하산하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날씨가 좋다면 파란색 신호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것은 팀 전체가 정상적인 계획대로 등반을 진행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날씨 예보가 좋게 나왔는데도 빨간색 불꽃을 쏘았다.(이것은 나중에 독일계 대원과 오스트리아계 대원간의 민족감정에 기인한 음모로 밝혀졌다) 그 신호를 본 메스너는 약속대로 6월 27일 새벽, 단독으로 미등의 바위 지대 900미터를 등반하기 위해 식량과 텐트, 로프도 없이 출발했다. 단지 작은 미녹스 카메라와 비상용 얇은 담요를 하나 가져갔을 뿐이다.

설벽에 피켈을 박아넣고 벽에 기대서 쉬는 횟수가 많아졌고, 하산할 때를 대비해서 주변 상황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때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기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한 등반가가 보였다. 누구일까? 그건 바로 귄터였다.

메스너는 베이스캠프에서 동생에게 위험천만한 자신의 단독등반에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래서 더 화를 냈지만 곧 히말라야에서 가장 큰 거벽의 정상부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며 행복의 파도를 탔다. 형제는 더없이 아름답고 보람찬 등정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악몽의 하산을 시작했다.

그후 30년이 지났어도 메스너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 동생이 너무 지쳐 있었고, 로프가 없어서 위험한 트래버스 구간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는 사실뿐이다. 루팔 벽으로 내려갈 수 없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반대쪽 디아미르 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 루트는 위험했지만 비박장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졸지에 사상 초유의 히말라야 자이언트를 횡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형제는 거의 반가량 내려갔다. 그곳에서 식량도 물도 확보지점도 없이 두 번째 비박을 감행했고, 정상 리지를 떠난 지 하루 반나절 만에 디아미르 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메스너가 귄터의 실종을 알게 된 것은 빙하를 걸어 내려갈 때였다. 당시 메스너는 동상과 탈진, 환각상태에 빠져 있었고 3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한 채 강행군을 해서 탈수현상이 심했다.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물을 찾는 일에만 집착했다. 그리고 귄터가 당연히 잘 따라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생은 형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고 길을 잘못 들어 빙하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메스너는 빙하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샅샅이 뒤졌다. 그는 방금 떨어진 커다란 눈사태의 흔적들을 발견했지만 귄터를 찾지 못했고,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치고 절규했다. 양치기들은 메스너를 도와 마을까지 데려가서 보살펴 주었다. 이 산의 반대편에 있었던 헤를리코퍼 대장과 원정대는 메스너와 동생이 죽은 걸로 단념하고 철수했다.

메스너는 운명의 산인 낭가파르바트를 자주 찾았고 디아미르 계곡에서 실종된 동생을 찾기도 했다. 그는 1970년에 자신을 구해준 감사의 마음으로 디아미르 주민들을 위한 학교건립기금을 기부했다. 다행히 2005년에 귄터의 유품이 빙하에서 발견되면서 메스너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다.

1970년 동생이 희생된 낭가파르바트를 시작으로 1986년 10월에 로체 정상에 오르면서 메스너는 인류 최초의 히말라야 8천미터 14 자이언트 완등자가 되었고, 지금은 살아있는 전설로 산악박물관 3개를 운영하고 있다.

호경필(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산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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